
노공일 지사가 종사관으로 있던 황간의진이 활약했던 충북 영동군 물한계곡.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처하자 거창·초계(현 합천군 초계면)·합천군 등지의 우국지사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장소는 충북 황간(현 충북 영동군 속면)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대장은 전기 의병 때 진주성을 점령했던 노응규(盧應奎) 의병장으로 당시 동궁시종관(정3품, 황태자 비서실장)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격, 일제 군경을 쳐부술 계획이었다.
이에 앞서 을사늑약 직후 노응규가 벼슬을 내놓자 광무황제는 비밀리에 시찰사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해 그의 거의를 고무했고, 이에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친족 가운데 명석한 족손(성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 가까운 친족이 아닌 손자뻘이 되는 사람)을 종사로 해 의병 규합에 나섰는데, 종사로 선발된 이가 노공일(盧公一, 1882~1950)이었다.
노공일은 창녕군 이방면 출신으로 노응규를 좇아 의병을 규합해 1906년 가을 충북 황간군 상촌면 직평(稷坪, 피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경상·전라·충청 3도의 분기점이며 산중 요새로 일제의 눈을 피해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들을 모집해 훈련을 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다.
노응규의 덕망에 주민들은 무기의 제조·운반·식량 제공 등의 일에 적극 협력했다. 병력이 증강돼 감에 따라 일부 군사들을 파견해 일본군 척후병을 처단했고 덕유산 등지에서 활약하던 문태서(文泰瑞)·이장춘(李長春) 의병 진영과 협력하며 서울 진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1907년 1월 21일 충북 청산경무서 황간분파소 순사들의 계략에 노응규 의병장 이하 서은구(徐殷九)·엄해윤(嚴海潤) 등 주요 장령이 체포됐고 노응규의 명령에 따라 제조한 화약을 예하부대에 전달하러 갔던 그도 체포된다.
법부와 일제는 노응규 의병장이 당상관 출신이라 체포된 자들을 한성경무서로 이감해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던 중 노응규 의병장은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순국하고 노공일은 그해 5월 18일 유형 7년형을 선고받았다.
피고 서은구와 피고 엄해윤 피고 노공일에 대한 안건을 검사 공소(公訴)에 의해 이를 심리하니, 피고 서은구는 작년 음력 11월 19일에 서로 면식이 있는 노응규의 초청을 받고 황간 상촌으로 가서 만난 즉, 노응규가 말하기를,
‘현금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압제하여 인민이 이처럼 고난을 받게 됐으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는지라 우리들도 역시 이 나라에서 생을 받은 국민인즉 외국의 모욕을 받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의중(意中)에 있는 지사들을 모아 경성 통감부로 함께 가서 담판하고 이론적으로 싸워 외국인을 축출하고 우리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생령의 안전을 기하되, 만일 뜻과 같지 못하면 같이 죽어 돌아오지 않기로 맹서하자’(중략)
법률을 적용함에 본 율에서 1등을 감해 각기 유형 7년에 처하기로 한다.(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 424~425쪽)
노공일은 백령도로 유배됐다가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백령도를 탈출해 승복을 입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