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0년대 사금을 채취하는 모습.
일자리 찾아 전북 금구 원평으로
1905년 11월 17일, 일제와 그들 앞잡이들에 의해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부터 통감부가 생기고, 국권은 일제의 손에 좌우되는 상황이 됐다. 이미 일제가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1905년)을 하면서 위조화폐를 대량으로 유통시키는 바람에 우리나라 경제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한 마을에 손꼽히는 부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세농이나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경남지역 사람들은 주로 호남지역으로 가서 농사를 돕거나 돈벌이가 쏠쏠하다는 소문을 쫓아 금광이나 사금 채굴 노동자로 나섰는데 고성에 살던 장패관(張貝寬), 창원의 최내홍(崔乃洪)은 사금 채굴장을 찾아 전북 원평으로 향했다.
당시 전북 금구군 수류면 원평리(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는 서장옥(徐長玉)·손화중(孫華中)·전봉준(全琫準) 등 개혁적 성향이 강하던 남접의 1만여 동학교도들이 주도해 이른바 원평취회(院坪聚會)가 이뤄졌던 곳이자, 동학농민군의 도집강소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했다.

최내홍의 행적이 실린 한국독립운동사 .
사금 채굴 노동자에서 의병으로
사금 채굴장에서 일하던 장패관과 최내홍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점차 상실돼 가는 것을 보고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돼 총살, 순국했다.
◆폭도(暴徒: 의병- 필자 주) 총살의 건
전주부 금구군 수류면 낙수동 이칠봉 당년 21세
경상도 창원 최내홍 당년 33세
경상도 고성(古城: 固城- 필자 주) 장패관 당년 41세
금구군 금구 파견 순사 타니카와(谷川篤次)로부터 폭도 3명을 총살했다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중략) 지난달 13일 새벽에는 80여 명의 폭도와 같이 김제를 습격해 일·한인에 다대한 손해를 가하고 도주 중 원평리에서 기병(騎兵)에 의해 이칠봉의 부친 외 5명은 총살되고, 장패관은 인후부에 총상을 입었으면서도 외 2인과 같이 도망하여 재차 원평리 부근의 촌락에 출몰하고 있었던 자로서 또한 그들의 말에 의하면, 10여명의 폭도가 그곳 부근에 잠복해 있다고 진술했으므로 일단 설유(說諭)를 가했으나 완강히 반항을 시도할 뿐 아니라 29일 오후 6시를 지났을 때 3명이 다 같이 동시에 도주를 기도했으므로 체포하려고 향했더니 목편(木片)으로 극력 저항해 부득이 총살해 사체는 면장에게 인도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권, 195~196쪽)
한국독립운동사는 ‘폭도에 관한 편책’을 번역한 것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07년 5, 6월경부터 이칠봉(李七奉)과 함께 의병에 참여, 전북 일대에서 활약했다. 1908년 1월 13일 8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전북 김제를 습격하고, 일본군 기병과 전투를 벌여 5명이 순국했다. 1월 29일 장패관은 인후부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10여 명의 의병과 원평리 부근에서 잠복하고 있던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 경찰은 의병들이 완강히 반항하며 탈출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장작으로 저항했기에 끝내 총살했다고 기록했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지난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