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동군 악양면에 있는 하동의병공원./하동군/
박홍지(朴弘之) 의병장은 하동군 화개하면(花開下面) 정서리(亭西里, 현 악양면 속리) 출신이다. 1908년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당시 28세 나이에 분연히 궐기해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1848~1907년) 의병진영에 참여해 국권 회복에 나섰다.
녹천은 전남 창평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7백의총’에 잠든 의병과 함께 순국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둘째 아들인 인후(因厚)의 사손(使孫, 조선 시대에 자녀가 없이 죽은 사람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일정한 범위의 친족)이다. 녹천의 집안은 대대로 왜적과 싸운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녹천은 명성황후 참살에 이은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바 있었는데, 1906년 12월(음력) 전남 창평군 저산(猪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전남 일원에서 투쟁을 전개하다가 이듬해 9월 하동 화개동으로 들어가 훈련했다.
그러자 동복·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의 의병과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영의 거창·안의·하동 지역 의병이 몰려들어 그 수가 약 1000명에 이르자 일제는 인근의 수비대는 물론, 진해만 중포병대대까지 동원해 의병을 공격했다.
10월 17일(음력 9월 11일)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에 하동 화개상면 탑촌에 진을 쳤던 김동신 의진은 다수의 피해를 입고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구례 연곡사(燕谷寺)에서 결사항전을 벌였던 녹천 진영은 녹천을 포함한 의병 수십명이 순국하고 다수가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박홍지는 고광순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은신책의 일환으로 위장 자수한 후 재거의를 모색했다. 그러다 1908년경 하동에서 활동하던 임봉구(任鳳九) 의병진영에 참여해 하동군 화개하면을 중심으로 전남 광양 일대에 걸쳐 총기와 탄약을 모아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이달(1908년 2월) 3일, 폭도 50인의 수괴인 박매지(朴每之)(일반적으로 박인환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박홍지인 것 같음), 10인의 장(長)인 임동구(林東九: 임봉구 의병장의 다른 이름)가 하동군 화개하면 봉대촌 부근에 있으면서…(중략) 하동수비대는 어둠을 이용해 오는 6일 새벽 화개하면 봉대촌에 이르러 그곳의 폭도들을 섬멸하려 한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권 122~123쪽)
‘4월 15일 동점촌(銅店村 하동 북방 약 20리반)에 그 방면의 적괴 임봉구(任鳳九)의 부하 3명이 총기 징수를 위해 침입해 촌민을 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졸 2명, 순사 2명을 급행시켜 그 도주 중을 추격해 이를 오살(모조리 무찔러 죽임)했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권 268쪽)
이처럼 박홍지 의병장은 적양동면 동점촌에서 군사들과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경 합동수색대와 전투를 벌인 끝에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