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상규 의사
황상규(黃尙奎, 1890~1931년) 의사의 호는 백민(白民)으로 밀양 출신이다. 일찍이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 고명학원(高明學院)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교재를 저술했다. 또한 밀양의 선각자 전홍표(全鴻杓)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해 청년학도 200여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1918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망명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 광복지사와 함께 ‘기미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해 회계과장을 맡았다.
그해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신철휴(申喆休)·한봉인(韓鳳仁) 등과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 및 요인·밀정 암살 등을 행동강령으로 하는 의열단 결성을 주도했다.
이듬해인 1920년 3월 그는 김원봉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폭탄과 기타 무기를 구입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해 4월 초 중국인 은익삼(殷益三)에게 도화선용(導火線用) 폭탄 7개와 투척용(投擲用) 폭탄 6개, 그리고 미국제 권총과 탄약 100발을 구입했다.
그리고 4월 하순경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구입한 무기들은 궤짝에 위장·포장해 기선(汽船)을 타고 만주 안동현(安東縣:현 단둥시)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안동 원보상회(元寶商會) 주인인 이병철(李炳喆)에게 비밀리에 갖고 온 물품들을 넘겨주어 앞서 부산에 내려가 잠입해 있던 의열단 동지 배중세(裵重世)에게 기차 편으로 우송토록 했다.
한편 그는 지린성으로 돌아와서 동지 곽재기(郭在驥)에게 그간의 일을 알리고 함께 중국 안동현으로 가서 윤치형(尹致衡)에게 여비 30원을 받은 후 1920년 5월 13일 한봉인·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로 잠입했다. 5월 19일 그는 미리 서울에 와 있던 김기득(金奇得)과 상하이에서 온 이낙준(李洛俊) 등과 더불어 서울 인사동 서상락(徐相洛)과 서대문의 정태준(鄭泰駿) 집을 오가며 거사방법을 논의했다. 그리고 국내의 동지인 이일경(李一慶)·김재수(金在洙)·김병환·배중세 등에게 연락해 부산 등지에 보내두었던 폭탄을 갖고 오게 하고 동지들과 거사대상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돼 결국 같은 해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체포됐고, 12명이 재판을 받았다. 7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해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 중앙간부, 조선어학회 간부 등을 역임했다.
백민 선생은 향리에 노동야학원과 여자야학원을 설립해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31년 9월 2일 생을 마감했다. 일경의 고문과 오랜 옥고, 신간회 자진 해체에 따른 울분이 겹쳐 결국 별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의사의 장례식은 밀양군민은 물론, 각지에서 몰려든 1만여명의 조문객의 애도 속에 5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