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우재룡 선생.
경북 의병부대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우재룡(禹在龍, 1884~1955) 선생은 창녕군 출신이다. 호는 백산(白山), 자는 이현(利見), 본명 외에 경옥(景玉)으로 불렸다. 심지어 김재수(金在洙)·김재서(金在瑞)·김상호(金尙浩)·김한조(金漢朝) 등 아예 성씨마저 바꾼 이름을 썼고, 이름이 많았던 만큼 일제강점기 반일투쟁을 다양하게 펼친 의사로 알려졌다.
우 선생은 1902년 대구진위대에 입대해 참교(參校:현 하사)로 있던 중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탈영해 1907년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연습장(練習將)으로 활약하면서 경북의 청하·영일 방면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자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을 의진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장을 맡아 흥해·신녕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정환직 대장이 순국한 이후 대장을 맡은 최세윤(崔世允)은 우 선생을 영천 서부지역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동화사를 근거지로 삼고 팔공산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산남의진은 1908년 2월부터 7월까지 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20여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무기 구입을 위해 대구에 잠입했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다.

경북 영천시문화원 앞 산남의진비./문화재청/
대한광복회 활동으로 체포돼 옥고
우 선생은 1911년 특사로 풀려난 후 1915년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基中) 동지와 대구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의 광복군(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 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해 광복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그는 조직 확대를 위해 만주로 파견돼 1915년 12월 지린(吉林)에서 손일민(孫一民)·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민단, 신흥학교 등과 연계해 혁명기지의 건설에 힘썼다. 또한 만주에서 국내의 자산가들에게 군자금 수합의 통문을 발송하는 한편, 김한종(金漢鍾) 등을 통해 군자금 모집과 일제 앞잡이 처단 활동을 펼치게 했다.
그런데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돼 동지들이 체포되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권영만(權寧萬)·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 등과 군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들은 임시정부와 연계해 더욱 조직적인 활동을 펴기 위해 임시정부 발행 공채의 매각, 광복 자금 수합 등의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1922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돼 16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37년 출옥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광복회의 재건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광복회와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2009년 1월)로 선정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