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산리에 있는 삼진8의사창의탑.
창원읍에서 만세의거 일어나다
1919년 3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경남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창원 애국인사들도 비밀리에 의거를 서둘렀다. 지도자들은 3월 23일(음력 2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연락을 한 결과, 다른 장날과는 달리 이른 아침부터 많은 장꾼들이 모여 들었다.
오후 2시 20분께가 되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중심 인물들이 장터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자 6000~7000명(일제 군경 기록에는 약 5000명)이 일제히 호응하니, 그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그곳 헌병 및 경찰관 주재소원만으로는 손을 댈 수 없게 됐다.
마침내 마산 중포병 대대와 진해 일본군이 동원됐고, 총검을 앞세운 이들의 탄압으로 오후 5시 20분 군중들은 부득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중심인물 31명이 검거됐다.
이러한 창원읍의 제1차 의거에 이어 4월 2일 장날 제2차 의거가 전개돼 또 다시 6000~7000명이 일시에 호응하니, 만세시위는 제1차 의거에 비해 보다 강력하게 전개됐다. 일제 경찰의 기록에는 ‘열광적인 소요가 야기되었다’고 표현됐고, ‘겨우 해산시켰다’라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이날 시위의 규모와 얼마나 끈기 있는 반일투쟁을 전개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3·1혁명 4대 의거 중 하나 삼진의거
3월 28일(음력 2월 27일) 당시 창원군 진전면 양촌에 거주하는 변상태(卞相泰)가 지도자가 돼 일어났던 진전면 오서리의 고현장날 시위는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도 1000여매를 인쇄했으며, 선전 격문(曰我同胞 有進無退, 우리 동포는 나아감이 있으나 물러서지 않는다)을 목판에 새겨 찍어 이를 민중에게 줬다. 이날 500여명(일제 경찰 기록 400명)의 시위는 격렬한 투쟁으로 발전돼 11명이 검거됐다.
이어 4월 2일 정오경, 변상태는 군중들에게 외쳤다.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 민족이며 자유국(自由國)의 국민이다. 일본의 간여는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뒤이어 변상섭(卞相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변상태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태극기의 물결 속에 민중의 목 멘 독립만세의 함성은 한없이 계곡으로 메아리쳐 갔다. 이튿날 삼진(진전·진북·진동면) 사람들이 연합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이 의거는 경기도 수원, 평안북도 선천, 황해도 수안의 대의거와 더불어 3·1혁명 4대 의거로 손꼽힌다.
특히 진전·진북 면장을 비롯한 민중 약 5000명(일제 헌병 기록 약 3000명)이 진북면 사동리 다리에서 진동 주재의 일제 헌병 및 보조원 8명과 현지 일제 재향군인 30여명, 마산에서 출동한 야포대대와 충돌해 그 자리에서 8명이 순국, 22명이 중상을 입는 등 창원 각지에서 순국한 사람이 320명이었다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에 기록됐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