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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⑩ 도내 최초 만세운동 일어난 함안

만세운동 불길 ‘가장 먼저’·‘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곳

  • 기사입력 : 2019-07-09 21: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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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은 본도에서 악성의 소요로서 그 정도도 전체로 보아 가장 심하였다.’ 일본군이 남긴 함안지역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함안군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9일 도내에서 가장 먼저 시작돼 4월 3일까지 34일간 11회 이상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20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다 목숨을 잃었고, 일본 군경의 피해도 군단위로 전국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치열했던 함안군을 찾았다.

    함안군 군북면 중암리에 세워져 있는 군북3·1독립운동기념탑./김승권 기자/
    함안군 군북면 중암리에 세워져 있는 군북3·1독립운동기념탑./김승권 기자/

    ◆도내 최초 독립운동, 연개장터 만세운동

    경남 최초의 독립운동 발화지는 칠북면 연개장터다. 경남의 한가운데쯤에 위치한 함안은 낙동강 밀포(멸포)나루를 이용하는 상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이곳에 자리한 연개장은 마산과 부산 등의 해산물과 함안·창녕·밀양·의령 등의 농산물이 교역되는 큰 장이었다. 반면 일본경찰의 치안은 다소 느긋해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마산경찰서 칠원주재소와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 만세운동을 준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이령교회 장로 김세민 선생을 중심으로 29명의 동네 사람이 교회에서 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1919년 3월 9일 낮 12시, 100명의 군중들이 모였고, 김세민 선생이 대회사를 하고 큰아들 김정오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난 이후 지역 유지와 경명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따르는 군중들은 영서, 영동, 상봉촌, 하봉촌을 돌면서 해가 저물 때까지 만세를 부른 뒤 해산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일본 경찰은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해 조사했으나 시위 사실을 축소하거나 부인해 모두 훈방조치됐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3일 후 대산 평림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는 영산의거와 밀양의거로 이어졌다.

    100년 전 뜨거웠던 만세 외침으로 가득했던 연개장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조선총독부가 연개장터 만세운동이 경남 각 지방으로 확산되자 후일 장을 폐쇄하고 가게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가 세워져 있다. 학생 6명이 다니고 있는 소담한 이 분교의 정문에는 ‘3·1 독립운동기념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넓은 운동장을 지나 학교 건물 뒷편으로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앞서 1976년 8월 15일 령서마을 뒷산에 세웠던 기념비를 연개 3·1독립운동기념회가 2003년 3월 1일 이곳으로 옮겼다. 기념탑 뒷편으로 길게 세워진 기념비에는 ‘칠북 3·9연개장터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기록과연개장터 유공자 90명의 명단을 새겼다. 매년 3월 이곳에서는 ‘함안 칠북 연개장터 3·9독립만세운동 기념 문화제’가 열린다.

    칠북초 이령분교 교정에 무궁화꽃이 피어 있다.
    칠북초 이령분교 교정에 무궁화꽃이 피어 있다.
    이령분교 뒷편에 있는 3·1 독립운동기념비. 이곳은 경남 독립운동 발화지인 연개장터가 있었던 곳이다.
    이령분교 뒷편에 있는 3·1 독립운동기념비. 이곳은 경남 독립운동 발화지인 연개장터가 있었던 곳이다.

    ◆치열했던 함안장터·군북 만세운동

    연개장에서 시작된 의거의 봉화는 함안읍내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어진 함안장터군북 만세운동은 삼남에서 단기간 현장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낼 정도로 치열했다.

    함안 장날이었던 3월 19일 함안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뜻을 품은 수천명의 군중이 몰렸다. 독립운동은 지역 유지였던 조한휘·이희석·한종순·이찬영 등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준비됐다. 시위에 앞서 비봉산에서 오후 1시경 고천제가 열렸다. 이후 시위 주동자인 이희석이 태평루에 집결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독립선언 전단과 태극기가 배포됐다. 오후 2시 드디어 주동 인물을 선두로 약 3000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을 시작했다. 일본 경찰이 총출동했지만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들이 첫 번째로 향한 곳은 함안주재소였다. 때마침 시찰 나온 기타무라 마산경찰서장이 주재소에 머물고 있었다. 경찰관이 시위대를 오만하게 대하자 격분한 이들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돌을 던지며 주재소를 6회에 걸쳐 습격했고, 서장에게는 ‘독립만세공명(獨立萬勢共鳴)’의 증명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이후 함안군청 앞으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화가 난 이들은 이어서 군수 민인호를 사로잡아 시위대 앞에 세워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했다. 군중의 일대는 다시 평소 그들을 가장 괴롭히는 등기소롤 몰려가 이를 파괴하고 우편국·일인 소학교도 습격했다.

    다급했던 일본은 오후 5시 40분께 마산 중포병대대 준하사관 이하 16명과 일경을 급파했다. 이들의 총검하에서도 군중시위대는 이들과 늦게까지 난투를 벌였지만 일 군경은 주동 인물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20일까지 계속된 주동 인물의 검거는 65명에 달했다. 재판 결과 43명이 6개월 내지 7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됐다.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 당시 주재소와 군청은 모두 사라졌고, 현재 군북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그려진 독립운동 기념 벽화만이 100년 전 뜨거웠던 현장을 기억한다.

    군북시장 건물 벽면에 그려진 독립만세 기념벽화.
    군북시장 건물 벽면에 그려진 독립만세 기념벽화.

    함안장터 만세운동 이튿날인 20일 함안 군북에서도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전날 함안읍 만세운동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온 조용호, 이재형, 조상규 등이 20일 군북 의거에 참가해 태극기를 만들고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날 시위는 전날 함안읍내 시위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두 단계로 나눠 진행했다. 제1단계는 덕대리 남단 신창야학교에서 학생 50여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2단계는 인근 냇가에 군중이 모인 가운데 오후 1시 정각이 되자 조상규가 둑 위에 올라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용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그 함성이 백이산에 메아리쳤다.

    시위대는 대열을 지어 신창, 소포, 안도를 행진하는 도중 장터 상인들과 밭매던 농부와 아낙네까지 차례로 합류해, 어느새 5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군중은 경찰주재소로 몰려갔고, 군중의 위압에 일군경은 실탄을 퍼부었다. 화가 난 군중은 주재소 유리창에 돌을 던졌고, 주재소 유리창은 깨지고 벽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다. 그러다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던 조용호는 큰 태극기를 잡은 채 적탄에 쓰려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날 일군이 쏜 60발의 총탄에 쓰러진 사망자는 20명이었고, 부상자는 18명에 달했다.

    군북 냇가에 세워진 군북 3·1다리를 건너면 ‘군북3·1탑’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후 함안읍 운동과 군북 거사 소식은 3월 24일과 4월 3일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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