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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④ 전국 두 번째 규모 만세시위 진주

기생과 걸인까지 연인원 3만여명 독립 외쳤다
3월10일경 진주 거리에 격문 나붙기 시작
김재화·조응래·심두섭·박대업·정용길 등 애국청년들, 격문 배포 항일분위기 주도

  • 기사입력 : 2018-11-2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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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의 3·1운동은 3월 18일경 촉발됐다. 이후 크고 작은 시위에 연 인원 3만여명이 참여해 서울 다음으로 3·1운동에 가장 많은 군중이 결집된 것으로 기록된다. 특히 기생과 걸인까지 장터로 나와 만세운동에 동참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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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시 진주성 내에 세워져 있는 3·1독립운동 기념비.

    진주지역의 3·1운동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일어났던 이유는, 일제가 만세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을 막기 위해 애국지사들을 사전에 구속하고 진주에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3월 11일에는 진주헌병대가 최고 비상령을 선포해 각급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리기까지 했고 검문검색을 한층 강화했다. 그러나 진주의 애국청년들은 극비리에 만세 운동을 추진해 참여 군중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당시 진주는 도청소재지로 진주 장날 등에 인근의 산청, 사천, 하동, 삼천포, 남해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거점 지역이었다. 때문에 진주 3.1운동은 진주에 국한되기보다 서부 경남을 대표하는 시위로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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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시 하촌동 하촌마을 회관에 세워져 있는 3·1운동 발상지 기념비.

    ▲진주 장날 울려 퍼진 만세 소리= 경성(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과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시위가 있은 후 3월 10일 경 진주의 거리에는 격문(교유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삼남지방에는 왜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면서 진주에도 항일 분위기가 서서히 고조돼 갔다. 이러한 격문을 배포하며 항일 분위기를 실천에 옮긴 것은 애국 청년들이다. 김재화, 조응래, 심두섭, 박대업, 정용길 등은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갔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감화를 받고 진주로 귀향했다. 이들이 품에 안고 온 것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이들은 김재화의 집인 집현면 하촌리(지금의 진주시 하촌동 하촌마을) 등에서 진주에서도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시기와 구체적인 거사 방법을 논의했다. 서울에서 격문을 가져왔으나 ‘교유문’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작성하고 구성해 수천장을 인쇄해 군중에게 살포했다. 교유문의 작성은 김재화가 맡았으며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의 인쇄는 천전리(천전동) 망경산에서 했다. 인쇄자는 심두섭, 박진환, 정준교 등 3명이었다. 김재화, 심두섭, 조응래, 이강우, 강상호, 강달영, 박진환, 정준교, 장덕익, 권채근, 한규상 등 애국청년들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천 장을 각 단체와 개인에게 배포했다.

    진주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일본군경은 더욱 삼엄한 검문검색을 강화해 갔다. 일제는 각 학교에 임시휴교를 명하고 일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토록 하였다. 하지만 이강우, 박진환, 김재화, 강달영을 비롯한 주동 청년들은 거사 일을 3월 18일 진주 장날로 정하고 시위 준비를 해갔다.

    진주읍 장날은 당시 매달 음력 2·7일에 열려 경남에서는 가장 큰 장이었다. 장날에는 진주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1만명의 인파가 몰려든다.

    마침내 3월 18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진주시내에 들어온 사람들은 옥봉동·평거동·천전리 등에서 시장으로 모여들었으며, 재판소 앞에서는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강우가 연단에 등장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4시경 시위대가 도청 앞에 모였을 때 군중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날 이병홍, 강재순 등으로부터 촉발돼 봉기한 정촌면 5000여명의 군중도 합세하기 위해 진주읍을 향해 돌진했다.

    ▲기생과 걸인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 18일 시위의 독립만세 함성은 날이 저물어도 계속됐다. 군중들은 망진산 등 곳곳에 봉화를 올려 동참을 유도했고 저녁에 노동독립단의 군중대열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한 데 이어 걸인독립단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벌어먹는 것은 왜놈들이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고 성토했다. 다음 날 19일에도 2만명의 군중이 시위에 참가했다. 당시 진주읍내 인구가 2만명, 진양 지역은 8만명 이하(일본인 거주민 포함)였음을 감안할 때 시위에는 수많은 여성들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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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를 올려 독립만세 운동 동참을 유도했던 진주 망진산 봉수대./김승권 기자/

    둘째날에는 논개의 기백을 계승해 오던 기생독립단도 태극기를 흔들며 남강 변두리를 돌며 촉석루까지 진출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주동 역할을 한 한금화 등 6명의 기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체포된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20일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한 수천명의 군중은 악대를 선두로 진주 경찰서로 몰려갔다. 일본군은 기마병과 소방대까지 동원해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했다.

    21일에도 만세시위는 이어졌고 그칠 줄 모르는 군중의 저항에 일본은 마산으로부터 일본군 헌병과 보병을 진주로 이동시켜 군대를 대폭 증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에도 시위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22일 수곡면 창촌리에서, 25일과 31일에는 문산면 소문리에서, 4월 18일에는 다시 진주읍내에서 폭발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진주 3·1운동의 주체 세력은 어느 특정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농민·학생 등 각계각층이 골고루 참여하였다는데 의의가 크다. 전국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노동독립대·걸인독립대·기생독립단 등의 시위도 있었다.

    진주문화원 추경화 향토사연구실장은 “자료 기록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걸인과 기생들의 숫자가 차이가 있지만 체포된 이도 있는 등 대부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진주는 임진왜란 때부터 항일 정신이 투철했던 지역으로 이러한 정신은 기생, 걸인뿐만 아니라 온 시민에게 한마음으로 깃들여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진주 정신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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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교육지원청 앞에 세워져 있는 소년운동 발상지 기념비.

    ▲소년운동 발상지= 일제강점기 어린이 운동은 소년회가 중심이 됐다. 진주소년회는 1920년 8월 전국에서 가장 처음 조직됐다. 소년회의 기폭제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의 어린이날 제정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교육지원청 앞마당에는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3.1운동 이후 1921년 3월 27일 진주에는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던 소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진주 제2보통학교(현 진주 봉래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강민호, 김경택 등 8명은 만세 운동을 계획하다가 일본에 검거돼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용훈 기자 yh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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