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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⑧ 충렬의 고장 양산

1919년 3월 13일 양산서 동부경남 첫 독립함성 울려퍼졌다

  • 기사입력 : 2019-04-3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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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시립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전’./김승권 기자/


    양산시 물금읍에는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이 기념탑은 양산 출신으로 항일 독립투쟁에 헌신한 선열들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9년 3월 1일 물금읍 디자인공원에 세워졌다. 높이 16.3m 주탑은 3·1독립만세운동과 농민운동, 의병 활동, 임시정부활동 및 학생운동 등 양산의 4대 항일독립운동을 상징하는 4개 탑신이 상부에서 하나로 합쳐지도록 해 두 팔을 벌려 만세를 부르는 군중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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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디자인공원에 있는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

    양산은 물금읍 때문에 신도시로도 알려져 있지만 독립운동 역사는 깊다. 선각자들의 비밀결사운동 관련을 시작으로 3·1만세운동인 1919년 3월 13일 하북면 신평의거, 3월 27일 양산읍내 의거가 있었다. 이후 1920년대 청년운동·신간회운동·소년운동·부인회운동·근우회운동, 1930년대 전반기 농민운동, 1941년 학생운동 등으로 해방될 때까지 전개됐다. 예로부터 항일투쟁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충절의 고장으로 불린다.

    양산의 독립운동은 그 중요성에 비해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기념탑이 세워지고 매년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행사도 이어지고 있지만, 후세에 지역 독립운동 역사와 정신을 알리기 역부족이라는 안타까움이 여전하다. 때문에 양산시와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등에선 기념탑이 있는 물금읍 디자인공원에서 4㎞ 남짓 떨어진 교동 춘추공원에 지역을 대표할 (가칭)독립공원을 조성할 계획을 갖고 있다.

    춘추공원에는 충렬사와 현충탑, 윤현진 기념비와 흉상, 추모비들이 서 있다. 독립공원은 오는 10월 첫 삽을 뜰 예정으로 기념관 등이 들어선다. 목표대로라면 내년 10월쯤 독립공원 조성이 마무리되어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거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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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 윤현진 선생 흉상.

    ▲양산의 독립만세운동=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노력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지난 3월 9일 하북면에선 100년 만에 ‘3·1 신평만세운동’이 처음으로 재현됐다. 양산 만세운동은 읍외지역인 신평마을을 시작으로 읍내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하북면 신평만세운동은 3월 13일 일어난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고증된다.

    읍외에서 먼저 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대사찰인 통도사에서 근대학교를 일찍이 운영해온 것과 연관된다. 통도사에서 운영한 지방학림과 서울 중앙학림 학생은 불교계 대표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통도사 지방학림 출신으로 서울중앙학림 유학생이었던 오택언은 한용운의 밀명을 받아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독립선언서를 갖고 5일 통도사로 내려온다.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대표 김상문, 통도사 강원 승려 등과 13일 신평장날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오택언은 7일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히지만, 거사는 만우스님을 중심으로 차질없이 진행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중부동에 살던 청년 엄주태는 부산을 찾았다가 13일 동래읍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벌인 만세시위를 접하게 된다. 엄주태는 집으로 돌아와 그다음 날 양산공립보통학교로 향해 전병건에게 양산읍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제의한다. 이들은 거사일을 27일 양산장날로 정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만반을 준비한다. 마침내 거사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이 군중 3000명가량 모인 장 복판에서 선언서를 나눠 배부한 후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읍내에서 약 2000명의 군중이 불온문을 살포, 선동을 하며 소요를 시작하여 그 행동이 흉포하면서 해산을 하지 않아 끝내 총기를 쓰게 되었다. 30일 하북면 신평, 다음 31일 이면 석계, 4월 1일 읍내에서 시위운동이 있어서 시작한 지 소요는 4회, 3개소에서 있었다.’ 일본군 조선헌병대 사령부가 작성한 ‘1919년 조선소요사건 상황’에 남은 기록이다. 양산의 만세운동이 그만큼 뜨거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양산의 독립운동가= 양산을 찾은 날 양산시립박물관에서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 특별기획전을 관람할 수 있었다.

    3·1만세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양산지역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자료 25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개최한 것이다. 이 기획전은 오는 6월 2일까지 공개된다. 전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지역 독립운동사 전반을 소개하고 향후 과제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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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시립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전’./김승권 기자/

    만세운동 주축이었던 통도사 지방학림 유생들이 통도사 성해 선사의 회갑(回甲)을 축하하며 1914년에 쓴 시(詩)와 기념사진을 볼 수 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오택언을 비롯해 윤현진 등 당시 학생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여기 사진 속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했지만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양산을 대표하는 항일독립운동가로 만우스님(1897~1968), 김말복(1909~1985), 윤현진(1892~1921), 구하스님(1872~1965), 오택언(1897~1970) 등을 소개하고 있다. 오택언과 만우스님은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김말복은 항일의식을 전파했다. 구하스님(김구하)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윤현진은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지내며 당시 돈 30만원의 사재를 헌납해 임정의 재정을 돕는 등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들이다. 또 독립운동을 한 흔적은 남아 있지만 서훈을 받지 못하는 등 ‘찾지 못한 이름들’의 대표 인물로 이규홍(1893~1939)을 소개한다. 그는 임시정부 설립 시 재무총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은 인정되지만 국내에 들어와 1930년 이후부터 사망 시까지 친일 의혹이 있다는 사유(사후행적 이상)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지은 양산시립박물관 학예사는 “동부경남에 이른 시기에 3·1운동이 일어난 지역이 양산이다. 양산의 3·1운동이 언양과 울산으로 이어졌으며, 통도사 스님들의 3·1운동이 표충사를 비롯해 밀양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도 지역 출신인 윤현진 선생이 독립자금을 보태고 임정 운영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또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학예사는 “전시는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를 선정하고 있는데, 업적도 있지만 비교적 유품이나 독립관련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다. 만우스님은 따님이 계셔서 많은 독립활동 자료를 받았고 다른 운동가들도 자녀나 손자 등 가족분들께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며 “자료가 부족해 알려지지 않거나 잊힌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다. 양산 항일독립운동가는 46명으로 파악되는데 이 중에는 서훈을 받지 못하거나 이름만 남아 있는 분들도 있다.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알려지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상황도 부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도 연세가 들고 있어 지체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재경 기자 j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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