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6월 2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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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⑨ 4·3 삼진의거

마산 삼진(진전·진북·진동) 주민 수천명 독립 외친 ‘기미년 4대 의거’

  • 기사입력 : 2019-06-11 21: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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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에 의해 이름마저 빼잇긴 그곳이었다. 진해군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삼진(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은 진해라고 불렸지만 일제에 의해 진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일제는 진해라는 이름을 해군기지가 건설된 웅천에다 가져다 붙였다. 러일전쟁을 대비해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 진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다시 삼진으로 돌아가보자. 진북면 지산리와 진동면 사동리를 잇는 사동교(지금의 지산교 자리). 100년 전 그해 기미년 4월 3일. 음력으로는 3월 3일이었다.

    수천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일제의 근거지인 진동으로 향하는 이들을 일제 헌병 등이 가로막았다.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던 이들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급기야 무자비한 발포가 이어졌다. 사동교 다리 위에서 8명이 숨졌고 더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바로 4·3 삼진의거다.

    시간을 며칠 전으로 되돌려보자.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이었다. 오후 1시께 백승학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의 독립만세 선창에 따라 수많은 민중들이 만세를 외쳤다. 참여한 민중은 수백명이었다. 대한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던 군중들에게 일제는 무력 진압에 나섰다. 11명이 검거돼 6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삼진의거의 1차 의거였다.

    검거를 피한 변상태와 권태용, 권영대, 변상헌 등은 다시 거사를 계획했다. 날은 삼월 삼짇날로 잡았다. 주도자들은 진전면 양촌리 초계 변씨 사당에서 거사를 도모했다. 양촌에서 적석산으로 접어드는 초입에 있는 사당이다. 성구사가 바로 그곳이다. ‘두문불출’의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변빈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변연수 장군, 그 아들인 변립의 충절을 기리던 사당이었다. 이곳은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든 곳으로 삼진의거 발상지로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은 사당문이 닫혀 있고 낡은 태극기가 걸려 있다.

    삼진의거 발상지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 ‘성구사’ 일원.
    삼진의거 발상지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 ‘성구사’ 일원.

    4월 3일 오전 9시께 진전면 양촌리 일암마을 앞 냇가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고 1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변상태의 연설이 이어졌다.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민족이며 자유국의 국민이다. 일본의 관여는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연설이 끝나자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민중들은 만세를 외쳤다. 시위행렬은 진동으로 향했다. 좁은 길에 1000명이 넘는 군중이 행진을 시작했고 이 행렬에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합류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시위가 사동교 앞에 도달한 시각은 오후 2시께였다. 기록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소 3000명에서 최대 8000명의 민중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의거에 동참했다.

    삼진의거 시위행렬도 

    지금도 도시가 아닌 이곳에서 당시 마산부에 거주한 조선인 총 인구가 1만명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독립을 갈망하며 시위에 참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규모 시위행렬이 진동을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경은 진동을 사수하기 위해 사동교 앞에 진을 쳤다. 진동은 삼진에서 일제의 중심지가 된 곳이었다. 사동교에 앞서 일제군경이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제군경은 헌병과 헌병보조원, 재향군인 등 30여명이 무장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몸싸움은 격렬했다. 김수동이 사동교 위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독려하는 과정에 그를 제지하는 일본 헌병보조원을 다리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순간 총성이 울렸고 김수동이 쓰러졌다. 당시 총을 쏜 헌병보조원은 조선인이었던 심의중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삼진아리랑’에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노랫말이 전해진다.

    김수동이 쓰러지자 변갑섭이 김수동이 들고 있던 태극기를 들어 일본 헌병 오장의 머리를 내리쳤다. 일제군경은 군도로 변갑섭의 팔을 잘랐다고 전해진다. 결국 변갑섭도 쓰러졌고 본격적인 충돌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수동과 변갑섭뿐만 아니라 변상복, 김영환, 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등 8명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진북면 지산리 지산교 앞에 있는 ‘팔의사 창의탑’은 이들을 기려 후대에 세운 것이다. 1946년 사동교 건너 암벽에 창의비가 세워졌다가 1963년 현재 위치에 탑이 세워졌다.

    진동면 사동교 옆에 위치한 팔의사 창의탑.
    진동면 사동교 옆에 위치한 팔의사 창의탑.

    일제에 의해 시위대가 해산된 후에도 숨진 8의사의 시신은 사동교 위에 그대로 있었고 날이 저물어서야 수습이 됐다. 부상자들도 많았는데 일제가 지정한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거부하고 마산 삼성병원과 진주 배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삼진 지역민들은 십시일반 부상자들을 위한 치료비를 모금하기도 했다.

    삼진의거는 진전과 진북, 진동의 삼진이 연합해서 진행한 대규모 의거였고, 수원 제암리 의거, 평안도 선천읍 의거, 황해도 수안 의거와 함께 기미년 전국 4대 의거로 평가받고 있다.

    삼진의거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성구사에서 양촌 쪽으로 나와 다시 진동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 편에 순국한 여덟 분을 모신 팔의사묘가 있다. 다시 진동을 향해 오다 보면 왼쪽 편에 2008년 만들어진 애국지사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창원 애국지사 8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조그만 전시관도 마련돼 있다. 전시관에는 삼진의거의 계획부터 진행과정 등을 안내한 전시물과 함께 수형기록, 사당교 앞 의거 상황을 묘사한 디오라마도 전시돼 있다.

    삼진의거 당시 순국한 여덟 분을 모신 진전면 양촌리 ‘팔의사묘’.
    삼진의거 당시 순국한 여덟 분을 모신 진전면 양촌리 ‘팔의사묘’.
    지난 4월 3일 진동면과 진북면 일원에서 열린 삼진의거 100주년 기념식 및 재현행사.
    지난 4월 3일 진동면과 진북면 일원에서 열린 삼진의거 100주년 기념식 및 재현행사.

    3·1독립만세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구산,삼진연합청년회와 창원시는 지난 4월 3일 시민 1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삼진의거 기념식 및 재현행사를 가졌다. 특히 이날 특별히 제작한 대형태극기를 팔의사 창의탑 근처에 타임캡슐로 안치했다. 100년 후인 2119년 4월 3일 이를 열어 후손들이 삼진의거를 기억하라는 뜻에서다.

    글= 차상호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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