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4월 07일 (화)
전체메뉴

[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18) 함양

민초, 총검 앞 격렬한 만세운동… 불교 선사 독립운동 활발
정순길·윤보현·정순귀·노경식 주축
1919년 3월 함양장터서 ‘독립만세’ 함성

  • 기사입력 : 2020-03-10 21:01:25
  •   
  • ‘군중대열에서 뛰쳐나온 하승현은 일 헌병에 “검거한 우리 애국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윤영하가 분견소를 박차고 돌진하자 일군 헌병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해 왔다. 하승현은 쓰러져 즉사하고 윤영하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 흉보를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은 원수를 향해 맹호같이 육박해 갔다. 일 헌병은 다시 총포와 권총을 난사해 하재익은 권총 3발을 맞고 쓰러졌으며, 하재연 또한 총포에 쓰러졌다. 부자(父子) 숙질(叔侄)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 그 모양을 바라볼 때 그 누구가 민족적 의분심을 느끼지 않으리오. 그러나 그들의 총기 앞에 맨주먹의 애국 군중이 어찌하리오.’

    1919년 3월부터 일어난 함양의 독립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함양에선 그해 3월 28일과 4월 2일 함양읍 장터와 3월 31일 안의면 장터로 수천의 민초가 일어나 만세운동을 펼쳤다.

    또 백전면 화과원과 마천면 영원사 등지로 불교계 선사들의 독립운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화과원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비밀리에 대던 곳으로 오늘날 그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백용성 선사가 일제 탄압을 피해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기지로 활용한 화과원./경남신문 DB/
    백용성 선사가 일제 탄압을 피해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기지로 활용한 화과원./경남신문 DB/

    ◇함양장터 만세= 함양의 첫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28일 함양읍 장터에서 일었다. 읍내 유지인 정순길·윤보현·정순귀·노경식 등 4명은 전국적으로 퍼지는 만세운동의 함성을 따라 이곳에서도 만세의거를 일으켜야 한다고 합의를 보았다. 이들은 밀의를 거듭한 끝에 거사일을 3월 28일 함양읍 장날로 약정하고 의거 준비를 서둘렀다. 거사일 이들은 미리 만들어 둔 크고 작은 많은 태극기를 몸 속에 숨겨 함양읍 시장에 도착한다. 이날 아침부터 유달리 많은 장꾼이 모여들어 일경의 경계는 삼엄했다.

    이들은 굴하지 않고 이날 오후 3시 30분 수천 군중이 모여든 때, 준비해 온 큰 태극기를 장 복판에 세우고 작은 태극기들을 재빨리 군중에게 나누며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도 이에 일제히 호응해 만세를 고창했다. 그러나 다수 일군 헌병이 정순길 등 4명을 총검을 들고 달려와 끌려간다. 오후 4시 격분한 군중 수천 명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이들은 주동자들이 갇혀 있는 일군 헌병분견대로 몰려가려 했으나 일군 헌병들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후 6시 30분까지 시위를 하다 해산했다.

    이때 이곳 병곡면 연덕리에 사는 김한익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다음 장날 재차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동지들을 모았다. 4월 2일 김한익은 자기 집에서 만든 큰 태극기를 숨겨서 동지들과 시장으로 잠입한다. 정오경이 되자 약 3000명(일경 기록 약 2500명)의 장꾼이 모여들었다. 김한익은 시장 중앙에 쌓여 놓은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어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며 시장을 누비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김한익이 군중을 지휘하다 일군 헌병에 검거되어 일군 헌병분견소로 끌려가게 된다.

    여기 군중은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다시 만세를 소리높여 불렀다. 이때, 군중대열에서 뛰쳐나온 인물들이 있었다. 바로 앞서 등장한 하승현과 윤영하 등으로, 이들이 일군 헌병들에 애국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며 목숨 바친 격전을 벌이고야 이날 만세운동이 끝이 났다.

    ◇안의장터 만세= 3월 31일 안의면 장터에서도 장날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곳에선 더 일찍이 거사가 모의되기도 했지만 성사되진 못 했다. 수동면 상백리에 사는 고재경·종재원은 3월 25일 안의읍 시장의 의거를 꾀하여 “3월 25일 안의 시장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를 터이니 찬성자는 집합하라”는 전단을 음식점 앞 길가 나무 등에 붙여 관심을 모았으나 이날 의거는 단행되지 못했다.

    이어 서하면 봉전리 김병창·임채상·정순완·전재식·조제헌 등은 지곡면 보산리 급천서당의 청년 학생 김채호와 금천리의 최석룡 등과 함께 안의장터 의거를 밀의한 후 거사일을 3월 31일 장날로 약정해 준비를 서둘렀다. 때가 되자 이들은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감춰 안의면 장터로 향했다.

    오후 1시 30분 김병창 등 주동 인물 5명은 장 복판에서 감춰온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고 독립만세를 부르려는 찰나에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어 오후 2시 최석룡이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준 후 장에 모인 약 1500명(일군 기록 약 1000명)의 군중과 함께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오후 7시까지 시장을 누비고 시위를 전개하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동 인물들의 석방도 요구했다. 그러나 이를 저지하려 거창 일군수비대 중대장 이하 20명이 급파돼 오며 군중들이 해산되고 주동 인물들이 검거됐다. 함양에서 있었던 기미년 그날의 독립운동 흔적은 오늘날 상림공원 내 함양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한 대한의사 하승현기념비와 대한의사 김한익기념비, 함양읍 만세기념비 정도만 찾아볼 수 있다.

    함양군 상림공원 내 함양읍 만세기념비.
    함양군 상림공원 내 함양읍 만세기념비.
    함양군 상림공원 내 대한의사 김한익기념비.
    함양군 상림공원 내 대한의사 김한익기념비.

    ◇불교계 대표 독립운동 선사들 자취= 함양은 또 기미년 만세운동 전후 불교계 선사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백전면 화과원과 마천면 영원사 등지로 독립운동가 백용성(1863~1940)과 백초월(1878~1944) 선사 자취가 남아 있다. 백전면 백운산 8부 능선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을 댄 화과원이 있다.

    백용성 선사가 일제 탄압을 피해 방대한 규모로 화과원이란 농장을 마련해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기미독립선언에 참여하고 만해 한용운 선생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백 선사는 이곳에 수만 주의 과수를 심어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불교운동을 펼치며, 과일을 재배하고 도자기를 구워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군산항을 통해 비밀리에 중국 상해와 용정 등지로 전달했다.

    화과원엔 16동의 건물에 수십명 승려가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6·25전란을 겪으며 폐허가 되어 당시 심어졌던 과수만 남았다가 고 정혜원 스님(백용성 선사의 손상좌)이 1991년 원장으로 부임하며 복원에 힘 써 2005년 백 선사가 거처한 터에 봉류대를 복원했다.

    화과원은 2000년 경남도 기념물 제229호로, 2017년 국가 현충시설 지정지역으로 지정됐고, 2015년부터 국가사적지 지정을 위한 노력이 본격화됐다. 아울러 백초월 선사는 영원사로 출가해 승려의 길을 걸었다.

    1916년 영원사 주지가 된 뒤 영원사 재건 불사를 추진했다. 스님은 1919년 서울로 상경해 서울 진관사 등을 거점 삼아 중앙학림에 민단본부 설립해 민단 책임자로 활동하며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들에 전달하고 승려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함양군은 스님의 출생지인 고성군과 진관사가 자리한 서울 은평구 등과 함께 그 업적을 알리기 위한 선양사업에도 나서고 있다.

    화과원의 경우 3·1운동 100주년이던 지난해 국가사적지 지정을 목표로 했지만 아직 실현하지 못 했다.

    김흥식 함양문화원장은 “군민들은 함양장터 등지로 일제에 맞서 연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만큼 독립 의지가 강하고 격렬했다. 이들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것과 아울러, 화과원의 국가사적지 지정은 우리의 여전한 숙제이기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고 힘을 모아야 할 일이다”고 말했다.

    글= 김재경 기자·사진=성승건 기자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김재경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