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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경남의 독립운동] ② 독립운동 중심 밀양

독립운동 수훈자 75명 배출한 ‘절의의 고장’
‘독립장’ 받은 도내 27명 중 밀양 출신 10명
일제 떨게한 ‘의열단’ 밀양 사람들이 주축

  • 기사입력 : 2018-09-1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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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크다.

    독립운동으로 ‘독립장’ 수훈을 받은 경남지역 인물이 27명. 그중에서 10명이 밀양 출신이다.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 많은 곳이 바로 밀양이다. 밀양 출신 독립운동 수훈자는 75명에 달한다.

    서울에 이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3·1독립만세운동이 거셌던 곳도 밀양이었고, 교육운동과 종교운동, 학생운동 등 다양한 반일투쟁이 밀양에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일제를 떨게 했던 ‘의열단’을 만든 인물들이 또한 대부분 밀양 사람들이었다. 영화 ‘암살’에서 카메오로 출연했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약산 김원봉의 대사가 바로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였다.

    내년 2019년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하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자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19년 11월에 ‘의열단’이 만들어졌으니 밀양으로서는 또한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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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시 내이동 석정 윤세주 선생의 생가.

    ◆3·1운동= 밀양시 밀양대공원로에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밀양독립기념관이 연결돼 있다. 독립기념관 밖에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린 ‘선열의 불꽃’ 조형물이 있고,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이 원을 이뤄 둘러싸고 있다. 박물관은 지자체마다 있지만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별도의 공간까지 마련한 곳은 많지 않다. 이곳은 2008년 세워졌고, 독립운동기념관의 이름으로는 전국에서 세 번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념관이 선 곳은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의 소유지였고, 당시 돈을 들여 매입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같은 달 13일 밀양으로까지 이어졌다. 밀양면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8차례 만세시위가 있었다. 을강 전홍표 선생과 윤치형·윤세주 선생의 주도로 시작된 밀양의 만세운동은 14일 밀양공보학생시위, 15일 유림만세 시위, 20일 안희원 장례와 4월 2일 밀양소년단, 4월 4일 용회동장터 시위, 4월 6일 부북면 시위, 4월 10일 청도면 시위 등으로 이어졌다. 3·1만세운동으로만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밀양인이 28명에 달한다. 밀양 독립운동기념관에는 그 당시 상황을 담은 디오라마(diorama)를 비롯해 만세운동의 기록물들이 많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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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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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옆 ‘선열의 불꽃’ 조형물을 둘러싸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의열운동= 밀양시 노상하 1길(내이동)에는 ‘의열기념관’이 있다. 독립만세운동 이전인 1900년대 초부터 해방 바로 직전인 1945년 7월까지 일어났던 의열운동을 기념하는 곳이다. 의열관이 서 있는 자리는 바로 의열단장인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이기도 하다. 의열관 바로 옆집은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렸던 석정 윤세주 선생 생가가 있는 곳이다.

    의열기념관 1층에는 지도가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주요 거점이 표시돼 있다. 지도상에 독도 위치에 서면 자동으로 영상이 재생된다.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한 1939년 의열단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다.

    그 주변으로 김병환·김대지·정동찬·황상규·전홍표·고인덕·이장수 등 독립운동가들의 생가지가 남아 있다. 과거에 해자였던 도랑을 따라 의열기념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 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하천 너머는 옛 밀양경찰서 터이고, 그 주변으로 동화학교 터와 밀양공립보통학교 터가 있다.

    밀양에서 벌어졌던 3·1운동의 태극기를 만들고 보관했던 곳이 바로 윤세주 선생의 집이었다. 의열기념관 옥상에 서면 윤세주 선생의 집과 옛 밀양경찰서는 지척이다.

    의열운동은 ‘의열단’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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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이동 의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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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내 기록물들.

    ◆의열단= 1919년 11월 10일 중국 길림시 광화로 57번지 반씨의 농가에서 의열단이 창단됐다. 김원봉, 윤세주, 김산윤, 한봉근, 한봉인 등 밀양사람 5명을 비롯해 13명이 모여 의열단을 창단했다. 황상규 선생 등은 고문으로서 의열단 창단을 이끌었고, 김원봉이 단장을 맡았다.

    의열단은 7가살, 5파괴의 목표를 세웠다. 조선총독 이하 고관과 친일파 거두 등을 가살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등이 파괴 대상이었다. 창단 이듬해인 1920년 1차 암살폭파계획으로 밀양을 선택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가담자 전부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의열단은 그해 12월 27일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밀양인의 기개와 의열단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앞서 9월에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일본인 서장을 폭살했다.

    의열단은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등 23차례에 걸쳐 무장 항일투쟁을 벌여 일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됐고, 단장인 김원봉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걸렸지만 김원봉은 해방 이후 귀국하기까지 건재했다.

    의열단은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로 이어지며 항일 무력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최필숙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부소장은 “밀양 없는 의열단 없고, 의열단 없는 의열투쟁은 없다”는 말로 밀양과 의열운동의 관계를 한마디로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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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내 밀양면 만세운동을 포함해 8차례의 만세운동을 축소한 모형./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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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이동 항일운동 테마거리.

    ◆밀양은 왜?= 의열단뿐만 아니라 밀양 출신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 또한 수많은 민초들이 참여했던 3·1운동. 밀양에서는 어떻게 독립운동이 활발했을까?

    최필숙 부소장은 “교육의 힘”이라고 말했다.

    문산 손정현 선생은 1897년 ‘개창학교’를 세웠고, 이후 밀양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밀양교육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13일 밀양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었고, 당시 학생들은 3월 14일 만세운동을 일으켜 전교생이 참여하기도 했다.

    항재 이익구 선생과 아들 성헌 이병희 선생이 세운 ‘화산의숙’, 이병희 선생이 일제의 강제 폐쇄를 딛고 다시 세운 ‘정진의숙’, 을강 전홍표 선생이 세운 사립 동화학교는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었다.

    종교인들도 교리를 넘어서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에서는 춘화교회, 밀양장로교회가 중심이 됐고, 교회는 교육에도 힘썼다. 불교계에서는 표충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농민들을 규합해 농민투쟁으로 승화시켰고, 표충사 내 ‘표충학원’ 출신 학생들이 단장면 용회동 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필숙 부소장은 “밀양의 독립운동은 비밀결사에서 의열운동, 만세운동, 종교운동, 학생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됐다”며 “지금도 밀양의 독립운동 연구는 계속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들을 기리는 활동은 더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차상호 기자 cha83@knnews.co.kr

    *참고자료 : 경남의 독립운동 그 현장과 운동가들(도서출판 선인), 일제강점기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사단법인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경상남도 각 시군의 3·1독립운동(경상남도 향토사연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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