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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어머니의 길- 윤재환 (의령예술촌장)

  • 기사입력 : 2023-11-20 2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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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환 의령예술촌장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다. 동네에 학교가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공부를 파하고 피란을 해야 했다. 그렇게 어린시절을 보내다 남강이 흐르는 들판마을에서 살다가 산골마을로 시집와서 지금껏 생존의 시간을 지켜가고 계신다. 8남 1녀의 9남매 중에서 8번째인데 제일 위 오빠가 2남 2녀를 낳고 41세에 별세했고, 막내 남동생은 1녀를 낳은 지 3개월 만인 31세에 별세했다. 나머지 6명의 오빠들은 학교 갔다가 오다 하굣길에 물에 빠져서, 또는 군대에 가서 등등 해서 어린 나이거나 젊은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모두 일찍 요절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던 어머니는 3남 4녀의 장남 집에 시집와서는 4남 1녀를 낳았다. 시집온 지 6년이 지나서야 겨우 큰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못 낳는다고 쫓겨날 뻔했다고 한다. 그리고 줄줄이 아들 넷과 막내딸을 낳았다. 그렇게 농사일을 하면서 다섯의 자녀를 낫 놓고 기역자를 알 수 있도록 잘 키웠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1남 1녀를 둔 36세가 된 큰아들을 그만 하늘나라로 보냈다. 매년 여름이면 고구마를 심던 그 마을 건너편 밭에 묻었다. 가슴에 젊은 큰아들을 묻고 슬픔에 잠겨 말없이 지냈다. 매일같이 산소에 가서 머리를 쓰다듬듯 풀을 뜯으며 흐르는 세월에 아픔을 삭혔다. 그리고 큰아들을 잃고 생애 가장 큰 시련을 보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남편을 2년 뒤에 또 저 하늘나라에 있는 큰아들 곁으로 보냈다. 그렇게 63세에 홀로 되어 25년을 남편이 남겨둔 논과 밭 몇 뙈기 정도에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특히 그동안 죽을 고비를 수차례나 넘겼다. 밤을 따다가 밤나무에서 떨어져 얼굴이 다 깨지고, 독사에 물려 스스로 허벅지에 끈을 칭칭 동여매고는 인근 보건소에 가서 처치를 받고, 셋째 아들이 편리하게 이동하며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준 4륜차를 가져온 그날에 운전 연습하다 쇠로 된 경운기 적재함을 들이받아 얼굴이 깨지고, 경로용 전동휠체어를 타고 마을 앞 들판 끄트머리에 있는 논에 물 보고 오다가 공사중인 길 언덕배기를 내려오다 떨어져서는 머리가 깨진 채 수로에 빠져 엎어져 있던 것을 큰아들 친구와 둘째 아들 친구가 즉시 발견하여 구조하였고, 긴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혈을 받고서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일시적으로 치매가 와서 천장에 있는 형광등 불을 끄지 못해 청소용 밀대를 들고 등을 두드리기도 했다. 또 3년 전인 2020년 7월 여름에 급성 갑상선암이라며 길어야 한 달 또는 1주일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감당 못한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크고 가까운 병원에 갔다. 역시나 똑같은 병명을 말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도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기적을 바라는 일도 사치라는 생각에 편안히 보내드리고 싶어서 그동안 살아오신 추억을 얘기하며 1주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냥 형식적으로 검사를 한 결과가 급성 갑상선암이 아니라 혈액암이라고, 그러니까 1주일밖에 살지 못한다던 시간에서 다시 생존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암을 무사히 극복하고 3년을 더 살아오신 88세의 어머니는 그 어느 해 가을보다 더 풍요롭게 살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던 어머니는 오빠와 남동생을 줄줄이 보내고, 또 큰아들과 남편까지 보내고 난 뒤에도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은 것은 물론 여러 차례 죽을 고비까지 다 넘기고 살다가 그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기역자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오신 굴곡의 시간만큼 더 노쇠해진 몸은 스스로 기역자가 된 것이다.

    퇴직하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햇살 좋은 가을날 마당에 핀 노란 국화꽃으로 가면 어머니의 몸은 한글 자음 첫 자인 기역(ㄱ)자이고 나의 몸은 모음 끝 자인 이(ㅣ)자가 되어 ‘기’자가 된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아오신 꾸불꾸불 굴곡의 시간이 자음 ‘ㄹ’자가 된다. 길이다. 어머니의 길이다. 그 길은 아버지의 시간으로 가는 어머니의 길이다.

    윤재환 (의령예술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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