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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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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거창빼재오미자농원 대표 강삼석

덕유산 ‘빨간 보석’과 14년… 농부 인생의 단맛 알았어요

  • 기사입력 : 2011-10-1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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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창빼재오미자농원 대표 강삼석(48)씨와 부인 신정숙(45)씨가 수확한 오미자를 한곳에 모으고 있다.
     

    이번에는 누구를 할까 고민하던 차에 후배가 강력추천하고 나섰다. 거창에서 오미자농원을 하는 분인데, 신지식인에도 선정되는 등 참 좋은 분이라고 했다.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검색해보고 창원에서 출발, 약 3시간이 지났을까. 비행기 이·착륙 시 느끼는 귓속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나타났다. 덕유산 자락의 해발 700~800m여서 그런 듯했다.

    굽이굽이 산자락 도로를 따라 도착한 곳. 산세 좋고 공기도 좋다. 산골짝 농원으로 들어서자 마당에서 남자와 여자 둘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넉넉한 미소로 맞는 그들은 바로 거창빼재오미자농원 대표 강삼석(48)씨와 부인 신정숙(45)씨, 얼마 전부터 인근에 살면서 일을 돕고 있다는 처제였다. 산양산삼 택배물량이 밀려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란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주머니 일행이 들이닥쳤고, 창원에서 온 그네들에게 생(生)오미자를 챙겨주고서야 주인공과 자리했다. 1시간여 훌쩍 지났고 해도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농부 강삼석’. 농부라서 농부라고 표기한다고 했다. 고집스러움이 살짝 묻어났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는 농부다’인 셈이다.





    부친 따라 양봉일 시작

    농부 강삼석씨는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 2068 ‘거창빼재오미자농원’ 대표로 방송도 타고 신문에도 나고 제법 알려진 인물이지만 결혼 전에는 양봉 일을 했다.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 태생인 김씨는 4남1녀 중 막내로, 고교 2학년 때부터 방학이면 양봉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방랑끼가 있어서인지 그게 좋았다.

    “양봉은 계절 따라 꽃 따라 이동을 많이 한다. 한 해에 보통 18번을 옮겨다니게 된다. 10여 년을 그렇게 지냈다.”

    양봉을 위해 꽃을 따라 전국을 떠돌던 그는 쉬고 싶어졌고, 30세 때인 1991년 빚을 내어 현재의 농원 부지 500평가량을 사고 집을 지었다. 고향에서 소·돼지도 키우고 농사도 지으며 살고자 했다. 황무지 같은 산비탈을 개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젊음 하나 믿고 땀을 흘렸다.

    1992년 어느 날 부산에 사는 사촌 형수가 이웃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처녀를 소개했고, 결혼했다. 쉬고 싶었는데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북 영양이 고향인 신씨는 홈페이지 소개글에서 “신랑될 사람이 거창의 깊은 골짜기 비탈진 밭에 초지를 조성하여 소를 모는 목동처럼 산다고 하길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라는 노래가사처럼 생각하면서 시집을 왔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농사일인 데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밭을 매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남편 몰래 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몇 년이 지나면서 공기 좋고 물 맑고, 온갖 새소리에 산골짜기 물 흐르는 소리가 너무 좋아졌다”고 했다.



    강삼석씨와 부인 신정숙씨가 수확한 오미자를 발효숙성시키기 위해 장독에 붓고 있다.


    운명 같은 오미자와의 만남

    1녀(고2) 1남(초등6년)을 둔 강씨 부부는 결혼 후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라고 했다. 소와 염소, 사슴, 산돼지도 키우고, 고랭지라서 무와 배추도 심었다. 잘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소 파동으로 소 사육도 접고, 농사가 잘되면 배추가격이 폭락해 수확을 포기한 적도 많다. 오지 수준이라 물류 비용도 만만찮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부부는 가을이면 더덕이며, 약초를 캐러 온 산을 누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 위에 빨간 열매가 예쁘게 탐스럽게 달려있는 것을 본 신씨는 열매를 한 소쿠리 가득 따왔다. 신맛, 단맛 등 다섯 가지 오묘한 맛을 가졌다는 오미자였다. 부부는 일부를 말려서 꿀에 절여 차를 만들었다. 맛이 상큼했다. 도시 손님들에게 대접하니 좋다고 했다.

    “그래, 이것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가 1997년으로 기억했다. 강씨 부부는 산에서 오미자 열매를 따다 씨를 선별해서 밭에 심기 시작했다. 일부 주민들은 “산에 지천으로 널린 게 오미자인데 무엇하러 밭에서 키우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부부는 열심히 심고 가꾸었다.

    오미자는 덩굴식물로 심은 지 3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기에 2년 동안은 수확이 없어 생활이 힘들었다. 식당도 했지만 산사태 피해도 보고, 오지라서 그런지 별 재미도 보지 못했다.

    다행히 열매는 주렁주렁 열렸고, 부부는 차를 연구하면서 밭과 산을 오미자농장으로 탈바꿈시켜 나갔다. 농장 규모도 500평에서 8000평, 1만1000평으로 늘렸고, 지금은 14만평에 이른다.



    신지식 임업인에 선정

    거창빼재오미자는 해발이 높아 특히 품질이 좋다고 강씨는 자랑했다. 그래서 가격도 문경 오미자보다 2배 이상 비싸게 거래된다고 했다.

    강씨 부부가 오미자를 재배하고 오미자차를 연구한 지도 14년. 그동안 정제 문제와 관련해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다. 거창군농업기술센터와 5년여 공동노력 끝에 정제기술 개발에 성공했고, 강씨는 지난 2006년 전통방식 오미자차 제조법을 개발한 공로로 산림청 ‘신지식 임업인’으로 선정됐다. 관련 특허도 취득했다.

    지금은 생오미자나 오미자차가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됐지만 초창기에는 판로를 고민해야 했다. 강씨는 입소문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인터넷 홈페이지(www.gcomija.co.kr)를 만들고 다른 사이트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생각은 주효했고, 날로 구입 문의가 쇄도했다. 방송과 신문에 보도가 잇따르면서 전국에서 직접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졌다. 연간 4000~5000명이 다녀갈 정도였다. 초창기에 1000명이던 회원수가 지금은 3만명이 넘는다.

    “이제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견학온다면 정중히 사양하고 있다. 멀리서 오시는데 20분도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때문이다. 3년 전부터는 홍보도 안하고 있다. 농장을 좀 더 제대로 갖춘 뒤에 다시 개방할 생각이다.”

    2008년 임산물 친환경부문 생산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포상을 받은 강씨는 몸에 좋은 오미자와 산양산삼을 안 먹었으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란다. 부부는 아침 6시에 기상해 밤 11시·12시가 되어서야 잠이 든다고 했다. 얘기 도중 연신 사람 좋게 웃음 짓는 모습이 살갑고 호흡이 척척이다. 천생연분인 게다.


    강삼석 대표가 출시를 앞둔 오미자 엑기스팩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또 다른 도전, 산양산삼

    강씨는 거창빼재오미자차의 대중화를 위해 엑기스를 팩(파우치)으로 만들기로 하고 지난 8월 6000만원을 투자해 관련 설비를 갖추었다. 연내 본격 시판에 나설 예정이다.

    오미자는 매년 9월 한 달가량이 수확 시기다. 아울러 해걸이를 해야 하는 관계로 부지 전체에서 매년 수확을 하지는 않는다. 강씨 농장에서는 많이 할 때는 30t까지 생산했으나 요즘은 연평균 15t을 생산해 생오미자 8000만원, 오미자차 2억5000만원가량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인건비 지출이 2억원이 넘어 많이 남는 농사는 아니라고 했다. 사람의 손이 많이 간다는 뜻이다.

    강씨는 수확철이면 현재는 지역 어른들이 와서 일을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이마저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6년 전부터 다른 사업을 준비해 왔다.

    바로 산양산삼(山養山蔘) 재배다. 산삼의 씨를 받아서 산기슭에서 자연상태서 키운 산삼이다. 산삼 씨를 뿌린 지 6년이 되어야 시판이 가능한데, 올해 첫 수확기를 맞아 판매 중이다. 지난 설과 추석에 각각 2000만원어치를 팔았다. 카페 회원들에게 문자 안내를 날리면 금방 팔려나간다고 했다.

    강씨의 농장은 현재 밭 3만평, 산 11만평 등 총 14만평. 이 가운데 산 2만평에 산양산삼을 재배하고 있다. 한국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친환경농산물인증(유기능인증)도 받았다.


    나는 전문 임업인이다

    전문 임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강씨는 인터뷰 도중 수차례 ‘농부’임을 강조했다. 전문 임업인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일손이 많이 달려서 걱정이라는 그는 앞으로 임업 쪽도 대량 생산보다는 개인(독자) 브랜드로 가야 생존의 길이 보일 것이라고 했다. 일본처럼 가업으로 이어갔으면 좋겠지만 앞으로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농부’ 강씨는 향후 포부를 묻자,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농장 입구 도로변에 전문임산물판매장(가칭 빼재휴게소)을 건립할 계획이며, 산양산삼의 외화벌이 차원에서 일본 등 해외수출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글= 홍정명기자 jmhong@knnews.co.kr

    사진= 전강용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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