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딸애는 침대에서 자고나는 바닥에서 잔다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나는 바닥이 편하다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2011-10-20 01:00:00
-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정재학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하늘이 죽어서 조금씩 가루가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나는 아직 내 이름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뢰침 위에는 헐...2011-10-13 01:00:00
- 동박새- 김두안그는 동박새도시에서 집을 짓는 그는빨간 코팅장갑을 끼고철근 몇 가닥 어깨에 메고 휘청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요목수들 망치소리 들려와요동백은 저렇듯 멍울로 꽃 피워요산이 쩌렁쩌렁 붉어요핑 쇳소리 내며 떨어져요참 헐렁해요녹슨 꽃을 밟기도 해요피멍이 든 못 자국 망치로 두들겨요바람은 차갑고 도시는 안전화보...2011-10-06 01:00:00
- 작업일지 10-추락물에 대하여- 최석우리는 경직되어 있다.한 면만이 날이 서 있다.맑은 날, 이 도시의 흡반 근처를 배회하다 보면삐꺽이는 불륜의 콧소리가 보인다.저기 번쩍이는 외벽 뒤에 숨은 앙상한 뼈다귀,불치의 골절, 그 사이사이로 내통하는 귓속말과위태한 추락물들.미려할수록도도할수록 가볍게 건드리기만 하면,호 하고 불기만 하면,무너져 내...2011-09-29 01:00:00
- 하현- 도종환반쪽 달빛으로도 뜰이 환하다산딸나무 흰 잎이 달빛으로 더욱 희게 빛나서산 짐승들 길 찾기 어렵지 않겠다중국에서 왔다는 발효차를 달여 마시며고적(孤寂)의 뒤를 따라오는 호젓함을 바라본다숲의 새들도 고요의 죽지에 몸을 묻고입술을 닫은 한밤중잔별 몇 개 따라나와밤의 한 귀퉁이 조금 더 윤이 나는데남은 몇 모...2011-09-22 01:00:00
- 딸레- 송진권앵두나무 아래서딸레를 데리고 가자쬐그만 아주머니는 두고 가자바구니에 담아둔 앵두는 뒤엎고물크러지기 시작한 앵두는 흔들어 떨구고앵두나무 그늘도 흩어버리자바늘로 딸레 눈을 찌르고딸레를 안고 어르며머리를 빗겨 주고곱게 화장을 시켜 내 각시를 삼자방울을 흔들면딸레는 노래하고 춤을 추고딸레는 눈이 먼 채 ...2011-09-15 01:00:00
- 냉기- 이준규새가 한 마리 책상 위에 있다누군가 새의 목을 비튼다손이 보이지 않는다나와 자리를 바꾼다검은빛이 하얗게 섞인다-시집 ‘흑백’ 중에서☞허, 참, 뭐 이런 시가 다 있노?바보 같은 독자들이여. 투덜거리지 말고 잘 보시라. 분명한 것은 <나>와 <새>, <새>와 <나> 둘뿐. 그 외의 것은 <검은빛...2011-09-08 01:00:00
- 이자의 종말- 맹문재대출 이자 때문에 자살했다는 농부의 얘기를 들으며종말을 생각한다어제는 의사도 자살했는데뉴스가 되지 않았다이자 부담이 소비를 둔화시킨다는 기자의 보도 역시담배 연기처럼 흩어졌다후식까지 챙기며 미래에 살고 있는 내가종말을 떠올리다니대출 이자를 갚지 못한 사람들이 연일 자살해도여전히 차들이 굴러가고...2011-09-01 01:00:00
- 사랑의 지옥-序詩 -유하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내 손 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난 지...2011-08-25 01:00:00
- 걸레질하는 여자- 김기택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엉덩이를 들어야 한다.무릎걸음으로 공손하게 걸어야 한다.큰절 올리는 마음으로아기 몸의 때를 벗기는 마음으로 닦지 않으면방과 마루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어디든 떠돌아다니고 기웃거리고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눌러앉는 먼지들오라는 ...2011-08-18 01:00:00
- 아들과 함께 보낸 여름 한 철- 이상국아들과 천렵을 한다 다리 밑에서 웃통을 벗고땀을 뻘뻘 흘리며 소주를 마시며나도 반은 청년 같았다이제서 말이지만 나는 어려서 면서기가 되고 싶었다어떤 때는 벌레가 되고 싶기도 했다그래도 나는 시인이 되었다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아들아 제발 시인에 대해 신...2011-08-11 01:00:00
- 엉겅퀴 - 박용래 잎새를 따 물고 돌아서 잔다이토록 갈피 없이 흔들리는 옷자락몇 발자국 안에서 그날엷은 웃음살마저 번져도그리운 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다어쩌면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기운 피곤이 보랏빛 흥분이 되어슬리는 저 능선함부로 폈다목놓아 진다.-박용래 시집 ‘...2011-08-04 01:00:00
- 연리지(連理枝)- 김동현너와 나는,칠흑의 어둠을 달리던 빛나는 두 행성.문득, 빅뱅의 큰 울림으로 맞부딪쳐살과 핏줄이 엉기고혈류를 공유하여우뚝, 한 쌍의 우주수(宇宙樹)로은하의 심장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다.그렇게 둘이던너와 내가 만나눈길, 손길 맞바꾸고가슴을 나누어영혼을 공유하는,너와 나는 한 그루우주수(宇宙樹).- 김동현 '연...2011-07-28 14:14:20
- 양파의 속- 윤봉한껍질이 다 속이다껍질처럼 보였던 것이 아니라껍질이 다 속이다그게 양파다버려진 껍질 속에버려진 수북한 껍질 속에진짜 속이 있다돌아보지 마라네가 가진 그게 양파다-윤봉한 ‘양파의 속’ 전문(시집 ‘붉은 꽃’, 2005)☞ 김해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정갈한 시어를 다듬는 시인의 세계인식이 잘 드러난 시다. 대상의 본질...2011-07-21 01:00:00
- 하루살이의 노래- 이규석하루살이의 노래하루벌이로 사는 나는이제나 저제나일을 기다리는 날이 많아진 요즘하루해가 너무 짧은 것 같다기다리는 날이 오래갈수록조급하게 앞서는 마음그 걱정과 불안을 안주로술잔 드는 날은 많아지고마시는 술잔 속에문득미소를 머금은 내 아버지 얼굴나도 몰래 아버지 하고 불러 본다아버지의 삶이 그랬던 것...2011-07-14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