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곱 살, 우주(宇宙)
일곱 살, 우주(宇宙)
- 함순례
바람이 들썩이는 호숫가
비닐돗자리 손에 든 아이가
풀밭으로 걸어간다
신발 벗어 한 귀퉁이 두 귀퉁이
메고 온 가방 벗어 세 귀퉁이
마지막 귀퉁이에 제 몸 내려놓는다
삼라만상을
돗자리에 전부 모셨다
-시집 ‘뜨거운 발’(애지)에서
☞ 일곱 살 아이에게 제 신은 신발...2009-01-06 00:00:00
- 별
- 복효근
등 하나 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한 생애가
알탕갈탕 눈물겹다
무엇보다, 그리웁고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
사람의 집에 뜨는 그 별이 가장 고와서
어스름녘 산 아래 돋는 별 보아라
말하자면 하늘의 별은
사람들이 켜든 지상의 별에 대한
한 응답인 것이다
-시집 ‘목련꽃 브라자....2009-01-02 00:00:00
- 사랑, 붉은
사랑, 붉은
- 정일근
은현리 들길 걸어가다
가을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보았습니다
또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
그 주검 곁을 지키며
오래 날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미물들도 저리 붉게
사랑했나 봅니다
제 몸과 색깔 다 벗고
모두 돌아가는 이 늦가을까지
-동인지 제3호...2008-12-30 00:00:00
- 신방(新房)
- 유재영
한 마리는 무릇꽃에서 날아왔고 다른 한 마리는 청미래 덩굴이 고향이다 오배자 동쪽 가지에서 첫날밤을 보낸 무당벌레 신혼부부, 아, 이 산중에도 나뭇잎 셋방 하나 더 늘어나겠구나
- ‘내일을 여는 작가’ 2008 겨울호
☞ 겨울, 숲을 생각한다. 나뭇잎마다 세 낸 방에서, 아주 편한 잠에 들...2008-12-26 00:00:00
- 고요한 연못
고요한 연못 - 조정권
물 위를 헤엄친 눈송이,
그 寒生.
그 분은 침묵이었네, 한 번도 발설되지 않은 침묵.
-계간『현대한국시』, 2008 여름 창간호에서
☞ 머리로는 도저히 해독되지 않는 시, ‘고요한 연못’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한 순간, 어떤 심연 속으로 아득히 빠...2008-12-23 00:00:00
- 미국을 생각하며 - 박구경
뜨거워지는 물을 피해 두부 속으로 파고드는 미꾸리
눈 깜짝할 사이에
무역센터로 들어간 한 세기 초유의 증오이고 싶다
한 사람이 또 떠나가는 의료원 앞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바글바글,
지난 세기를 모두 뚝배기에 섞어 넣고
밤새도록 온 우주로 알 수 없는 신호를 띄워 보내는
텔레비전
한...2008-12-19 00:00:00
- 홍시
홍시
- 이 안
어머니가 갓난 내 불알 두 쪽
바라보신다
아무도 물어가지 못하게
가장 쓰고 떫은 것으로
채우셨으나
아,
지금 내 몸이 너무 달다
-시집 ‘치워라, 꽃!’에서
☞ 이쯤 되면, ‘동화’냐 ‘투사’냐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아니, 무의미하다. 완벽한 물아일체의 상태, 바로 여기서 시는 탄...2008-12-16 00:00:00
- 내 마음의 지도
- 김경미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오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2008-12-03 00:00:00
- 황야의 이리 2
- 이건청
탱자나무가 새들을 길들이듯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침묵하겠다.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봄부터 가을까지 침묵하겠다.
이빨도 발톱도 어둠에 섞여 깜장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말뚝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
바람 소릴 듣겠다.
떨어진 가랑잎들을 몰고 가는 바람...2008-11-25 00:00:00
- 너는 꽃이다
- 이도윤
나는 오늘 아침
울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눈부시어
울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아파트 10층 시멘트벽 물통 사이
조막손을 비틀고 붉게
온몸을 물들인 채송화 하나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
눈물인 듯 매달려 피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햇살 하나
그를 껴안은 채
어깨를 떨고 있습니다
☞ 생...2008-11-14 00:00:00
- 화려한 유적
- 이윤학
무당벌레 한 마리 지금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 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 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 누구나 스스로의 삶...2008-11-07 00:00:00
- 가을엽서
- 강연호
훤칠하게 마른 빗줄기가
잠시 서성거렸습니다
바람 몇 다발 달려가다 넘어져
일제히 다시 구두끈을 조일 때
건널목 무단횡단하던 낙엽들
후이후이 휘파람 불었습니다
한 여자가 보도블록 위에
또박또박 화장을 찍으며 지나가고
동전만 삼킨 자판기를
나는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빈 호주머니 속...2008-11-04 00:00:00
- 물소리 솔바람소리
- 고재종
저 시린 가을물소리
어느 땡초의 목탁소리보단 가을물소리
산 아래 백리까지 끝까지
일거에 화안히 트이는 가을물소리
바람도, 바람도 드맑게 울려나서는
계곡에 들국 마구 터뜨릴 때 가을물소리
내 어느 날 지친 꿈 세상에 던져주고
저기 저만큼 억새꽃 하나로나 흔들릴 때
내 어디...2008-10-30 00:00:00
- 생각하는 자유가 - 박이도
가을엔 돌아가고 싶다
그림자 따라 빈 들에 나서면
사라지는 모두와 결별의 말을
나누고 싶어
기러기처럼
아득히 사라지는 세월, 세월을 향해
아쉬움을 울고 싶다
허연 낙엽은 지고
마른 풀잎은 가볍게 날리는
여기에선 모두가 부산하다
호올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 허수아비처럼
한참을 서...2008-10-29 00:00:00
- 못 - 최석균
내가 사는 집은
못의 힘으로 서있다
못은
둘을
하나의 상처로 묶는다
상처가 깊을수록
으스러져라 안고
소리를 삼킨다
못은 뒹구는 존재를 세우고
각진 세상을 잇는다.
☞ 우리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의식할 수 있는 것은 경험을 전제로 한다. 그 경험은 일상성을 넘어설수록 교육적이며 오래 남아 ...2008-10-28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