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장갑 - 원종태
농사는 절대 짓지마라노가다는 하지마라책상에 앉아 펜대 굴리라면서기라도 되어라 공부해라공사판에 걸린 목장갑이 말을 걸어온다아버지의 빈 도시락에는 늘보름달 빵이 들어있었다참으로 나온 그 빵 속에서토끼새끼는 쿵쿵, 방아 찧고 있다☞ 작업장에서 참으로 나온 빵 하나를 먹지 않고 빈 도시락에 담아 와 아...2016-05-12 07:00:00
- 물맛 - 장석남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영원으로 이어지는맨발인,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잦다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그 걸음걸이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2016-05-05 07:00:00
- 동해 - 이영광
내 여자는 동해 푸른 물과 산다탁류와 해초들이 간간이 모여이룩하는 근해의 평화를 꿈꾸지 않는다저녁마다 아름다운 생식기를 씻어 몸에 담고한층 어렵게 밝아오는 먼 수평선까지 헤엄쳐 나가아침이면 내 여자는 새 바다를 낳는다살을 덜어 나의 아들을 낳는다내가 이 세상의 홀몸을 이기지 못해천리 먼 길 절뚝여 ...2016-04-28 07:00:00
-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 안이 환하다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어둔 길 헤쳐 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배웠다 하는 사람의 집에 가면 서재가 있다. 서재를 훑어보면 그 사람의 지적 편력을 ...2016-04-21 07:00:00
- 酌川亭 - 고명자
흐드러지는 것 어디 봄날 꽃들뿐이리벚꽃 무색하게 사람들도 흐드러져한몫 피었다 지는 한이 있대도저 비장한 봄을 위하여 모두들 목매단다걸판지게 입담이 오가는 난전삶의 의뭉스러움을 툭툭 분질러 놓고무더기로 흐드러져 난장판을 빚는다소주병 탁배기잔 모로 자로 나뒹구는 평상 위겹겹의 슬픔 토해내며피곤한 ...2016-04-14 07:00:00
- 가족사진 - 유자효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환하게 웃고 있다옷을 잘 차려입고한껏 멋을 내고는마치 아무 근심 걱정 없다는 듯이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아들은 집을 나가고아버지는 말을 잃고어머니는 깊은 잠에 못 든 지 오래됐지만사진 속의 세 가족은 언제나 똑같이 웃고 있다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그래서 더욱 슬...2016-04-07 07:00:00
- 네 말 맞다- 김완하
어린 두 아들과 일요일동네 목욕탕 갔다알몸으로 대면하는 부자지간아이가 묻는다아빠, 왜 어른들은 고추에머리카락이 났어?곰곰이 생각하다가그렇구나,아빠는 오랫동안 그걸 모르고 살아왔구나고추에 머리카락이 나고고추로 사고하면서부터생이 이렇게 힘겨워...2016-03-24 07:00:00
- 천사의 날개 -명예퇴직2 - 김일태
새가 되려 하고 있다 아내는삼십오 년 달고 다니던보이지 않는 날개를 떼려 하고 있다키위새 같은 게 무슨 천사냐며한 번이라도 제대로 날아 보겠다던 희망을 접겠단다몇 번의 고비 때마다새 됐다우스갯소리로 내색하던 아내가진짜 새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날개가 꼭 나는 데만 쓰이냐며둥지 속 아프고 시린 상처...2016-03-17 07:00:00
- 그 꽃의 기도- 강은교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마한 땅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나에게 눈감은 별을 주세요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그믐 속 같은 별을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내가 일어서 있을 만큼만내가 눈 열어 부실 만큼만내가 꿈꿀 ...2016-03-10 07:00:00
- 미궁- 김수복
어디서 바람의 소문에 실려 온 꽃잎들창문에 얼굴을 대고 뚫어져라나를 들여다본다저놈들, 에미를 떠나와미색에 빠져 기웃거리다가미궁에 빠졌겠지나도 대여섯 살 무렵삼천포 앞바다 비단 폭에 빠져떠밀려서 저녁이 되도록 길을 잃고 죽을 뻔했다이놈들아, 빨리 돌아가☞ 사람의 일생을 황당한 자존심으로 밀고 가게 ...2016-03-03 07:00:00
- 모닥불- 이가림
한 무더기 동백꽃인 양변두리 눈밭에서 피어나는 것숨어서 더욱 타오르는 것강아지도, 구두닦이도, 자전거 수리공도,몸 파는 아가씨도 서로 다투어 꽃송이를 꺾는가둥그렇게 둥그렇게 어우러져언 손들을 내뻗고 있구나노을빛인 양 물든 인간의 고리☞ “절대세계, 피안, 무한, 불가시의 영역에 있을 법한 비전 같은 ...2016-02-25 07:00:00
- 첫사랑- 문태준눈매가 하얀 초승달을 닮았던 사람내 광대뼈가 불거져 볼 수 없네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불에 구운 돌처럼보기만 해도 홧홧해지던 사람그러나, 내 마음이 수초밭에방개처럼 갇혀 이를 수 없네마늘종처럼 깡마른 내 가슴에까만 제비의 노랫소리만 왕진 올 뿐뒤란으로 돌아앉은 장독대처럼내 사랑 쓸쓸한 빈 독에서 우...2016-02-18 07:00:00
- 오월 하루- 유귀자
묘목을 심은 지 삼 년 만에높다란 가지 끝딱 하나 열린 살구사랑하므로 떠나보내고기다리며 그리며 아껴보는하나뿐인 딸아이 보듯딱 한 개 높다랗게익어가는 살구 알아껴 아껴 훔쳐보는오월 한나절☞ 어떤 집이 있다. 사립문 대신 군불 불잉걸 가득 한 아궁이가 인사하는 집이 있다. 돌담 겨드랑이 장독대 곁에 감나...2016-02-11 07:00:00
- 만년필- 장하빈
만년필은 제 뚜껑 열어 꽁무니에 끼우는 순간긴 부리와 금빛 날개깃 달린펠리컨으로 태어나지잉크빛 바다에서 부활한 펠리컨은섬 기슭에 둥지 틀고 알을 낳기도 하다가붉은 사막으로 날아가 긴 부리로 산란한 발자국 남기기도 하지한때 나도 방바닥에 날개 펼치고 부리 내민 채모래 경전 속에서 밤새 부활을 꿈꾸며...2016-02-04 07:00:00
- 월광욕- 이문재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쪼그려 앉아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도둑이야!낯선 제 이름 들은 그놈들서로 화들짝 놀라도망간다마음 달아난 몸환한 달빛에 씻는다이제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해 아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해가 뜨면 눈을 떠야 하고 눈을 뜨면 생활에 몸을 구겨 넣어야 하는 사람에게, 철문을 열...2016-01-28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