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조승래
아라가야 왕들을 재운 산들이 소몰이 아이들을 내려다본다개울물 졸졸졸 천 년,어느덧 풀들이 다 자라면산은 살짝 아이들 키만큼 등을 낮추었다 풍금소리 들리는 저녁 ☞ 큰 그릇은 품는다. 보시기나 대접이나 종지나 품지 못할 것이 없다. 왕이나 초동(樵童)이나 영웅이나 무지렁이나 품지 못할 것이 없는 그릇, 그...2015-05-28 07:00:00
- 교실은 대초원이다 - 장인수 지금 서로 의견이 갈려서 토론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이하느님께서 지으신 자유롭고 광활한 대초원이 아니라면과연 어디겠는가?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풀이 저토록 끈질기게 교실 가득푸르딩딩 자라나고 있겠는가?울부짖고, 뿜질을 하고, 저녁을 끌며 야초를 뜯는 산...2015-05-21 07:00:00
- 길을 쓰는 ‘레이오프’ 여성 노동자- 톈허(한성례 역)
꼭두새벽의 싸늘한 바람이 얇은 옷을 입은 그녀의 몸에 불어와그 표정을 깎아간다 어스름한 가로등 아래그녀는 거리의 먼지를일부는 쓸어내고 일부는 들이마신다그녀는 레이오프 여성노동자, 태어날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하다허나 지금은 길거리가 내 것 같아서부자가 된 기분이다 이토록 기나긴 길을홀로 쓸고 있...2015-05-14 07:00:00
- 미안하다- 유재영
벌서고 돌아오는 길 먹잠자리 향해 함부로 돌 던진 일 미안하다 피라미 목 내미는 여울 물수제비 뜬 일 미안하다자벌레 기어가는 산뽕나무 마구 흔든 일 미안하다 내를 건너다 미끄러져 송사리 떼 놀라게 한 일 미안하다 언젠가 추운 밤하늘 혼자 두고 온 어린별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난날이 돌아다 보인다는 것...2015-05-07 07:00:00
-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2015-04-23 07:00:00
- 푸른 민주주의- 김소원
한쪽으로 조금만 기우뚱해도논은 더 이상 논이 아니랍니다징게맹게 너른 들에서외배미 용배미 깔딱배미까지저들이 이뤄 낸 소담스런 세상 보세요모양새와 크기 달라도가지런한 이마 선과 푸른 정수리들어깨 낮추어 하늘 받들고 있지요비와 햇살 골고루 나누는이음매 아스라한 저 조각보 아래땅어머니가 차려내 주시...2015-04-16 07:00:00
- 오뉴월- 박철
조부는 비위가 약한 분이었다69년인가 사람이 달나라에 갔다고 요란들일 때마치 요즘 손전화 들고 다니는 거 못 보는 이처럼쾅하고 미닫이문에 찬바람 일으키며저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달나라는 자부동 안이다그깐 거 좀 갔다고아마 조부는 당신이 노닐던 땅뙈기 잃은 양 싶었는지며칠 더 오뉴월 고뿔에 시달렸는데...2015-04-09 07:00:00
- 쇠뜨기- 박권숙
불가촉 천민으로 이 땅을 떠돌아도너는 가을벌레처럼 흐느껴 울지 마라풀밭에 온몸을 꿇린 소처럼도 울지 마라세들 쪽방 하나 없어 어린 뱀밥 내어 주고흙 한 뼘 햇살 한 뼘 지분으로 받아든 죄무성한 바람 소리에 귀를 닫는 저물녘뽑히면 일어서고 짓밟히면 기어가는너는 끊긴 길 앞에서 아무 말 묻지 마라허공에 ...2015-04-02 07:00:00
- 밥도둑- 김상현
배곯이를 하던 가난했던 시절, 밥도둑이 많았습니다. 그런 밥도둑을 위해 어머니는 늘 가마솥에다 밥 한 그릇을 고봉으로 담아 넣어 두었지요. 밥도둑은 그 밥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가마솥에는 여전히 밥 한 그릇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도둑은 ...2015-03-26 07:00:00
- 길- 김미숙
혼자 가는 것만 알았지
함께 가는 길은 알지 못했다
낯선 수도승에게 물으니
그도 몰라 헤매다 산으로 왔단다
이 세상엔 물어도 아는 이 하나 없고
저 세상은 언제나 통화 중이다
지친 마음 까치놀로 돌아눕는 저녁답
오늘도 사람들은 저 혼자 잘도 간다
☞ ‘현대’라는 단어 속에는 개인주의가 ...2015-03-19 07:00:00
- 께냐- 용창선한 사람을 잊는 데에 한평생이 걸렸다니
그리도 뜨거웠던 몸 싸늘히 식고 나면
연인의 정강이뼈로 만들어서 부는 피리
그대가 오신다는 바람결에 꽃은 핀다
외롭게 걸어왔던 이번 생(生)의 부은 발등
그리운 이름 부르며 무릎 꿇고 앉은 밤
온 생을 서서 기다린 다리뼈에 구멍 내어
절뚝이며 걷듯이 외로...2015-03-12 07:00:00
-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2015-03-05 07:00:00
- 세상의 잡것들을 위하여- 정순옥
기냥 둬라 잉 우리덜이라고 별거 있다냐, 갸들도 다 살아보것
다고 나온 것 아니것냐, 엄마 이건 잡초잖아요 너저분 보기 싫
은데, 야아는 시방 고것들 땜시 이쁜 꽃도 눈에 띄제 즈그덜이
다 꽃만 허것다고 해봐라 그게 워디 꽃으로 보인다냐?
두어 평 남짓 홀로 화단에서
잡초를 뽑아내려는 ...2015-02-26 07:00:00
- 즐거운 소음-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 아래...2015-02-12 07:00:00
- 꽃의 자리- 우무석
꽃은 피어야 할 제자리를 안다
어느 곳이어야 산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가를.
흙 속에 바람 속에 하늘 속에
꽃다이 피어야 할 자리를 찾아라,
더 늦기 전에.
☞ ‘죄’라는 말의 히브리원어는 ‘핫타스’인데 그 어원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엉뚱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이슬기 기자 2015-02-05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