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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23) 재소자들의 대모 차혜옥 목사

내 손의 온기가 그들의 상처 녹이길 바라죠

  • 기사입력 : 2009-11-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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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혜옥 목사가 마산교도소에서 재소자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한 후 격려하고 있다.


    차혜옥 목사는 선이 고운 옥색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옥 빛깔이 우아했고, 치맛자락의 누빔 문양은 이색적이었다. 차 목사는 아주 오랫동안 입은 옷이라며 한복을 소개했다. 그리곤 치마의 문양을 만지작거리더니, 천이 해어져 덧댄 흔적이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한복은 교도소에서 인연을 맺은 한 재소자가 출소 후 직접 지은 것을 선물한 것인데, 특별한 옷이라 자주 꺼내 입다 보니 10년이 지나자 치마가 해어졌고, 그걸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한복집에서 수선해 다시 입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한복만큼 ‘손이 예뻤을’ 것 같은 그이는 몇 년 전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친구의 마음이 고맙고 예뻐서 이 한복은 나한테 참 특별하다”며 옷깃을 매만지는 손길에서, 한복을 평생 동안 고치고 고치고 고쳐서 입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34년째 교도소 찾아 교화 활동

    34년째 교도소 문턱을 드나들며 재소자들을 만나 교화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갈릴리선교회의 차혜옥(67) 목사.

    1984년부터 법무부의 위촉을 받아 마산교도소 교정위원으로 활동 중인 그를 사람들은 ‘재소자들의 대모’라고 부른다. 아마도 봉사나 선교의 범위를 넘어선 그의 유별난 재소자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교정 활동은 한 달 2번의 교도소 예배와 3~4차례의 재소자 상담이 전부다. 그러나 그의 교화 활동은 비공식적인 게 훨씬 많다. 친어머니나 누나처럼 재소자들의 생일과 기념일을 챙기고 소소한 생활물품과 영치금을 넣어주는 건 물론, 출소 후에도 의식주 해결, 취업 알선, 결혼 중매까지 도맡는다. 그리고 특별 보호가 필요한 결핵환자 재소자들을 위해서는 병원 입·퇴원 수속에 병 수발을 들고, 상주옷을 입고 마지막을 지켜주기도 한다.

    그렇게 교도소 안팎으로 수천 명의 재소자들을 챙겨오다 보니 그의 몸은 늘 바쁘다. 전국 어디서라도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재소자가 있으면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찾아 나선다. 한 달에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일주일이 채 안 될 정도다.

    이렇듯 각별한 그를 향해 남들은 때때로 ‘도둑놈들 엄마’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그는 그 말도 고맙다고 했다.

    “저한테는 나를 믿고, 엄마·누나라고 불러주는 재소자들의 마음 그 자체가 감동이고 고마운 일이지요. 그들을 만나고,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일 자체가 감사하니깐요.”

    ‘갈릴리선교회’는 그의 교화 활동의 든든한 뿌리다. 지난 1997년 출소한 재소자들 30여 명과 함께 발족했다. 이곳에서 도움을 받은 재소자들은 사회에 나와 다시 선교회에 1000~1만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이 돈을 다시 재소자들을 돕는 데 쓰이는 식이다. 차 목사는 “이들이 힘들게 기부하는 1000원, 1만원은 거부가 내는 1억보다 소중하고 귀한 돈”이라며 웃었다.

    긴 세월 교화 활동을 펼쳐온 차 목사는 한국방송공사에서 주는 ‘좋은 한국인 대상(1998)’, 법무부에서 주는 대통령상 교정대상(2003)을 수상하기도 했다.


    차혜옥 목사가 교정활동을 마치고 마산교도소를 나오고 있다.

    △교도소는 내 운명

    차 목사와 교도소의 인연은 한 살 때부터다. 1944년, 그의 아버지인 차창선 목사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명으로 김해형무소에 수감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당시 핏덩이였던 차씨를 업고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차 목사는 “태어나자마자 교도소 문턱을 넘나들었으니, 아마 그때 내 운명이 정해진 게 아닌가 싶다”며 살짝 웃었다.

    1946년 8월 15일, 사형 집행일(8월 16일)을 하루 앞둔 아버지는 해방을 맞아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고, 출소 후 40년간 마산형무소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어쩌면 차 목사의 교화 활동은 엄밀히 따지자면, 아버지의 대를 이은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아버지 명령에 검은색 비로드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재소자들로 빽빽하게 가득찬 강당 앞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그런데 그 무서운 사람들이 나를 보며 막 울더라고요. 그때 막연하게 이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닌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후 20대가 된 차 목사는 “결혼 대신 주님의 일을 하라”고 권했던 아버지의 뜻을 뒤로하고, 결혼을 했다. 두 아들을 낳고 평범한 삶을 꿈꿨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혼란의 시간을 건너온 그가 다시 안식을 얻은 곳은 교도소였다.

    “교도소로 돌아오니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이후 34년간 청춘을 교화 활동에 바쳤다.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뭐냐고 묻는 아들에게 재소자를 만나러 가는 일이라고 답했다니, 그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간다.

    △“우리집은 공동 변소!”

    마산시 산호동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갈릴리선교회, 그 뒤편으로 비탈진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 작은 집 두 채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다. 이 중 한 곳이 차혜옥 목사가 사는 집이고, 그 옆집에는 그의 아들 내외와 손자가 산다.

    애초, 이 비탈진 집 두채는 차 목사가 출소자들을 위해 지은 사무실 겸 보호시설이었다. 수십년간 이곳을 거쳐간 재소자들이 수백명이 넘는다. 자고 먹을 곳이 없거나, 병세가 심해 받아주는 곳이 없는 재소자들을 받아주다 보니, 사람이 넘쳐나 집 옥상에 텐트를 치고 지내는 이도 있었다.

    어린 두 아들은 험악한 남자 어른들이 득실대는 집이 늘 불만이었다. 낯모르는 ‘손님’들 때문에 두 아들은 늘 다락방 신세였고, 환자들의 각혈과 기침에 집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화장실 한번 마음 편히 써본 일이 없던 작은아들은 창문에 ‘우리 집은 공동 변소!’라는 글자를 크게 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은 “우리 집은 집이 아니라 작은 교도소”라는 쪽지를 남기곤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진짜 엄마를 포기한 삶’에 후회는 없을까. 차 목사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남을 위해 베푸는 일이기 때문에 아이들도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 믿었다”고 했다. 지금은 두 아들 모두 엄마를 이해하고, 지원해 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재가 돌봄 활동은 7년 전까지 계속됐지만, 집에 어린 손자가 생기면서 그만뒀다. 결핵이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집 앞에 작은 방을 얻어 재소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현재 그의 집 주변에는 출소자 4~5명이 거주하며 매일 그의 집을 드나들고 있다.

    △“사람으로서 용서 안될 때도 있지만…”

    재소자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지만, 동시에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지닌 이들은 처음 만난 그에게 ‘예수쟁이’라며 무시하고 조롱했다. 그런 그들에게 다가서는 차 목사의 비법은 진심과 측은지심이었다.

    “재소자들을 만나보면 죄를 지은 이유가 없는 사람이 없어요. 가정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거죠. 모든 죄는 사회, 가정, 본인 이렇게 삼박자로 책임이 있는 거니깐요.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불쌍해요. 가족을, 사회를 잘못 만나서 그렇게 상처 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절로 나요.”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차 목사에게 끝까지 독하게 대드는 재소자는 없었다. 그의 진심을 느낀 재소자들이 어렵게 내보이는 속내는 일반인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한 경우도 많았다.

    그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밑바닥에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찾아주는 게 내 일이며, 그렇게 됐을 때 보람을 얻는다”고 말했다. 때로는 그들이 지은 죄가 무거워서 사람으로서 용서가 안될 때도 있지만, 그럴 땐 신의 힘을 빌린다고 했다.

    “조두순 같은 사건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죄잖아요. 사람으로서 저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죠. 그래도 신의 마음으로 본다면, 다시 죄를 짓지 않고 깊이 회개하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해요. 그도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니깐요.”

    △팔자 더러운 일? 귀하고 아름다운 일!

    그의 교화 활동에는 난관도 많았다. 30~40대 초반까지는 구애를 하며 집을 불쑥불쑥 찾아오는 유별난 남성 출소자들 때문에 두려울 때도 있었고, 집에서 기거하던 재소자들이 제법 큰 규모의 교화금을 훔쳐가 곤혹을 치른 적도 있었다. 폐결핵 환자를 대상으로 교화 활동을 하다 보니, 목에서 피가 나 치료를 받기도 했고, 가족 없는 이들의 장례식장에서 상주 대신 상복을 입는 일도 셀 수가 없다.

    그런 그에게 혹자는 “여자 치고 참 팔자가 더럽다”고 혀를 차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했다.

    “재소자들을 만나고, 그들이 제대로 된 삶을 찾아가는 데 힘을 보태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데요. 저 혼자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들과 함께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게 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에요. 하늘이 허락한다면 90살, 100살이 되더라도 걸어다닐 수 있다면 교도소를 드나들고 싶어요.”

    인터뷰 중간, 전화가 걸려왔다. 날이 추운데 점퍼가 없다며 하나 구해달라는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이즈를 묻고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누구냐 물었더니, 출소자라고 했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한 남자가 집 문을 두드렸다. 몇 가지를 묻더니 나중에 저녁을 먹으러 들르마 하곤 떠났다. 그도 출소자라고 했다. 차 목사는 늘 그렇게 출소자들의 밥과 옷을 챙기며 살고 있었다.

    글=조고운기자 lucky@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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