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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22) 열차 운행 84만㎞ 무사고 남만현 기관사

“레일 보는 눈도, 이웃 보는 눈도 크게 뜨고 달립니다”

  • 기사입력 : 2009-11-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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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철도공사 부산경남본부 마산기관차승무사업소 소속 남만현 기관사가 승무를 마치고 역사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다.



    열차 기관실에서 포즈를 취한 남 기관사.


    비번일을 맞아 독거노인들에게 배달할 도시락을 차에 싣고 있다.


    84만㎞ 무사고, 아찔했던 ‘추억’

    1993년 8월, 수일간 전국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온 나라가 물에 잠기고 엄청난 재산·인명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철도도 한순간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81년 고교 졸업과 함께 철도에 입문해 10년여 무사고 운행을 이어오던 32세의 부기관사 남만현씨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수백여 명의 승객 안전이 자신의 판단과 주의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우 속에서 조심조심 대전으로 갔다. 그날 밤 10시에 서울역에서 출발해 다음 날 새벽 3시30분 마산역에 도착하는 심야 무궁화열차를 대전역에서 앞 기관사와 교대하기 위해서였다. 낮부터 강해지기 시작한 폭우는 밤까지 그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내렸다. 곳곳에서 선로가 침수되는 위험한 상황에서 서행을 반복하며 어둠을 뚫고 조심조심 나아갔다. 모두가 곤하게 잠에 빠져 있는 새벽 시간, 창원역에 못 미친 덕산역을 통과하는 순간에도 엄청난 폭우는 그치지 않았다. 무서울 만큼 엄청난 양의 물이 철로 옆 수로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터널만 지나면 창원역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 하는 걱정에 터널을 통과하면서 속도를 낮췄다. 캄캄한 어둠 속을 불빛 하나만 믿고 터널을 막 벗어나는데, ‘아뿔싸~’ 산사태로 미끄러져내린 토사가 수십여m 앞 선로를 완전히 덮고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급정거를 시도했다. 덜커덩 하면서 열차는 앞으로 밀렸고, 천만다행으로 선로 매몰지점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멈추었다.

    ‘정상 속도로 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열차에서 내려 현장 접근을 하는데 또다시 2차 산사태가 일어났다. 일촉즉발이었다. 더 가까이 다가갔더라면 그도 매몰될 뻔했다.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무려 5시간여에 걸쳐 복구가 진행됐다. 승객들은 객차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승객들에게 빵과 우유를 제공하며 안심을 시켰고, 아침이 돼서야 종착지인 마산역에 도착해 일부 승객들에게는 택시까지 잡아 드렸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제가 설마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평소 속도로 달렸다면, 끔찍한 탈선 사고가 났을 겁니다. 그랬다면 탑승객들 상당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물론 저도 지금 여기 없겠지요. 조상님이 돌봤거나, 하늘이 보살펴 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철도공사 부산경남본부 마산기관차승무사업소 입사 29년차 남만현(48) 기관사.

    그는 이날의 일을 후배 기관사들에게 종종 무용담 삼아 들려준다. 그의 철마 인생 역정 중 가장 생생한 기억이다. 이날의 일로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했고, 운행 중에도 선로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자연히 무사고 기록은 더해갔고 지난 2005년에는 무사고 70만km로 건설교통부장관 표창을 수상하는 토대가 됐다. 현재까지 84만㎞ 무사고를 이어 가면서 지구 25바퀴에 맞먹는 100만㎞ 대기록도 목전에 두고 있다. 

    가난한 성장기 딛고 기관사 입문

    남만현 기관사, 그가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에서 보낸 유년기와 성장기의 기억은 온통 가난으로 가득 차 있다.

    “산골 농촌에서 살았던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랬겠습니다만, 육성회비를 제때에 못내 한 달에도 몇 번씩 고개를 넘어 집으로 쫓겨 오곤 했지요. 쌀이 없다 보니 검은 꽁보리밥 도시락을 급우들 앞에서 먹지 못해 부끄러워 했던 일도 있었고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네요. 허허~.”

    고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부터 산업근대화를 기치로 전국에 기계공고를 신설하거나 새로 지정해, 수업료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 장한 기술학도”를 목 터져라 외치며 쇠를 깎아 원형제품을 가공하는 선반기능을 습득했다. 졸업할 때까지 ‘꿈의 자격증’으로 불리던 정밀기능사 등 다수의 자격증도 땄다. 그러나 시대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79년 10·26사태로 대통령이 서거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기능인들이 우대받는 풍토가 사라졌습니다. 잘 나가던 기술학도들의 취업길도 막혀버렸지요.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철도공무원을 역임했던 부친과 철도차량 검수직원이었던 사촌 형님, 기관사였던 외사촌 자형 등이 제 인생의 이정표가 됐습니다.”

    곧바로 철도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졸업하던 해인 1981년 4월 부기관사 시험에 응시하고 8월 입사하면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다.  

    이웃을 보는 눈을 뜨다

    가난을 통해 이웃을 배웠을까? 기관사로 근무하면서도 늘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이 떠올라 맘이 편치 않았다.

    1994년 마산기관차사업소 내에 뜻있는 승무원들과 직원 7명을 규합, 주도적으로 사회봉사 동아리를 만들었다. 이름은 초심을 잊지 말고 정성을 다하자는 뜻에서 ‘참샘회’로 했다. 비번일만 기다려졌다. 늘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밤낮을 운행해야 하는 기관사 업무 특성상 일주일에 2~3일 비번이 돌아왔다.

    “수면 시간을 조금만 아끼면 어려운 이웃을 미력이나마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운이 샘솟았어요.”

    이후 마산에 있는 복지법인 경남종합사회복지관·성로원 등과 연계해 독거노인 도시락·부식 배달을 주 3회씩 하기 시작했다. 일년 동안 봉사 시간이 하루 3시간씩 평균 156회 468시간에 달했다. 보통 사람으로선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참샘회 회장을 맡아 ‘장애우와 함께하는 역사탐방 열차여행’을 처음 추진해 MBC TV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 회장 재직 동안 ‘3대가 함께 하는 한마당 큰잔치’, ‘저소득 결손가정 아동 사회문화체험 학습프로그램’, ‘독거노인 테마 기차여행’ 등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2005년 경남사회복지협의회 사회복지대상, 2005년 마산시 자원봉사대회 우수상, 코레일 사회봉사단 2006년 자원봉사 우수 프로그램 선정 1위, 2006년 사회복지법인 인애복지재단 감사패, 2007년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 표창장, 2007년 마산시 자원봉사대회 최우수상, 2008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상, 2008년 코레일 페스티벌 봉사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바람이 도로변 색바랜 낙엽들을 이리저리 뒹굴게 하던 지난 10월 27일 화요일 오후. 그는 마산시 교방동 산복도로 달동네촌 좁은 골목길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백발에 도시락 2개를 든 그의 외모에서 84만㎞ 열차무사고 운행 기록을 보유한 기관사의 이미지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맘씨 좋은 중년 아저씨가 딱 맞았다. 그가 이날 찾아간 곳은 중풍으로 수족이 온전치 못한 75세 독거노인 집과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는 78세 할머니 집 등 30여 호에 달했다. 도시락 배달 후에는 잠시 동안 말동무도 돼 드리고, 불편한 곳이 없는지 여쭙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한민족 공동체 아닙니까. 주변에 외롭고 병든 노인들은 내 부모나 마찬가지지요. 누군가는 돌봐야 하고, 제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제 봉사 활동이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지요.” 

    인생 2막은 ‘온 가족 사회봉사’

    기관사 업무가 주야를 가리지 않는 일이라 고달플 텐데 힘든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인생관이 뭐냐고 물었다.

    “공수래공수거, 언젠가 우리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승에서 이룬 명예와 부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어요. 이승에 사는 동안 이웃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느냐에 따라 마지막 순간이 보람되지 않겠어요. 제 봉사 수준은 이웃에 살짝 곁눈질하는 정도로 미약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의 철학은 ‘너와 나, 우리는 별개가 아닌 하나, 즉 불이(不二)사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철도 인생을 무사고로 마무리 지은 후에는 더 큰 봉사를 위해, 여생을 아내·아들과 함께 가족봉사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지구촌에 사는 모든 인간은 공동운명체 아닌가요. 인종과 국가를 떠나 모두 다 따뜻하게 입고 배곯지 않아야 세계 평화가 옵니다. 기관사 정년을 채운 후에는 온 가족이 폭넓은 봉사를 해 볼까 합니다.”

    계획을 현실에 옮기기 위해 준비도 차근차근 해가고 있다고 했다. 1999년 방송통신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그는 조만간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해 전문적인 사회복지 공부를 해 볼 작정이다.

    “가족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지요. 제 아내는 일찍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일하고 있고, 아들 녀석도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관사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봉사하는 또 하나의 삶을 엮어가는 남만현씨. 그가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이 향기롭고 훈훈했다.

    글=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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