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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1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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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가야 마지막 왕의 슬픔이 쌓여 있네

★ 산청 금서면 화계리 왕산 전(傳)구형왕릉

  • 기사입력 : 2009-09-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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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기슭 삼문에서 바라본 전(傳)구형왕릉. 비탈진 경사면을 따라 검은 돌들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단을 이루고 있다.



    류의태 약수터로 향하는 왕산 임도.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애달픈 사연이 전해지는 ‘전(傳)구형왕릉’.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기슭에 가면 패망국 가야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구형왕릉을 만날 수 있다.

    구형왕릉은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 오는 돌무덤으로 패망한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애통함에 ‘자신의 몸을 흙이 아닌 돌로 덮어 달라’고 해 지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창원에서 출발해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산청군 금서면 화계마을. 엄천강을 사이에 두고 함양군과 마주 앉은 화계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가을 햇살을 잔뜩 머금은 들녘은 노랗게 물들어 가고, 야산 곳곳에서는 밤이 토실토실 영글어 가고 있다.

    화계마을에서 만난 민향식(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씨는 전(傳)구형왕릉에 얽힌 이런저런 사연들을 들려준다.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은 양왕(讓王·나라를 양보한 왕)으로 김유신의 증조부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신라의 법흥왕(532)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논길을 지나 호젓한 산길로 접어드는 구형왕릉길은 사색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그러나 머릿속은 고뇌에 빠진 구형왕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구형왕은 어떤 왕이었을까, 왜 깊은 산청까지 와서 잠든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 앞에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구형왕.

    ‘영토를 내주고 백성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신라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할 것인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울분했을 구형왕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는 것만 같다.

    민향식 문화관광해설사는 “김수로왕이 김해 벌판에 가락국을 세운 지 500여 년 만에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슬픔에 잠겨 마음의 안식을 위해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한다.

    왕산으로 오르는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비탈진 산기슭에 수만 개의 잡석이 층을 이룬 돌무더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전구형왕릉이다.

    세속과의 경계를 이룬 홍살문을 지나 구형왕릉 돌무덤 앞에 서니 숙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비탈진 산의 경사면을 따라 제각각인 검은 돌들이 단을 이루고, 위로 갈수록 좁게 만들어져 멀리서 보면 거대한 학 한 마리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방단 석축구조물 형태인 구형왕릉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잡석으로 방형의 단을 이루면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올려 모두 7단을 마련한 돌무덤이다. 상면에 타원형의 봉분이 마련되었으나 일반 봉토분과는 전혀 다르다.

    특이한 점은 4층 전면 중앙에 감실(龕室)이 있다는 것이다. 깊이 68cm, 가로·세로 40cm가량의 정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용도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민 해설사는 “아마 감실은 특별한 용도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만들어진 것 같다”며 “영혼이 드나드는 문인 감실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데 의미를 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왕릉 주변은 등나무와 칡넝쿨이 뻗지 못하고 까마귀와 참새도 왕릉 위로 날지 않는다”며 “특히 무덤은 이끼나 풀도 자라지 않을 뿐더러 낙엽조차 떨어지지 않아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나라를 신라에 바친 왕의 한이 깊어서라고들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왕의 애달픈 사연이 애잔한 가야의 역사와 함께 가슴 한구석이 짠해져 오는 것 같다.

    구형왕릉의 맨 윗부분은 봉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석총과 같이 단아한 석조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겨 인근 계곡과 산야에서 주운 잡석들을 모아 아무렇게나 대충 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덤은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며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누군가 돌을 툭툭 던지며 쌓은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쌓았을까’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구형왕릉을 한 바퀴 돌아 돌무덤의 중앙에 서니 ‘가락국양왕릉’(駕洛國護王陵)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버티고 섰다. 그 주위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인 석장승과 세상을 밝히는 장명등이 있다.

    안내판에는 ‘전(傳)구형왕릉’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런데 누군가 ‘전’(傳)자를 애써 지웠다. 누가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전구형왕릉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픈 후손들의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훗날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며 ‘가락국의 옛 영광’을 되찾았지만 그는 나라를 넘긴 양왕의 멍에는 벗어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지리산 왕산 자락으로 스며들어 수정궁을 짓고 5년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 많은 구형왕의 슬픈 사연이 담긴 구형왕릉을 돌아본 후 왕산사지(王山寺址)와 류의태 약수터로 향했다.


    전구형왕릉 인근의 류의태 약수터.

    왕산 임도를 따라 1.4km 오르다 보면 고로쇠나무 등이 우거진 산길 숲 속에 부도(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 4기가 외롭게 놓여져 있다.

    민 해설사는 “어느 해인가 태풍으로 폭우가 쏟아지면서 왕산사 절터에서 계곡으로 떠내려온 것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고 말한다.

    현재 이곳은 왕산사 터를 찾기 위한 2차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곳곳에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분명 이 일대에 왕산사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다시 280m가량 오르니 ‘류의태 약수터’가 나온다. 흐르는 약수를 한 바가지 들이켜니 물맛이 끝내준다. 손을 담그니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파고든다.

    민 해설사는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 그 차가움에 5분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며 “이 약수는 피부병은 물론 나병 환자, 위암 등도 고쳤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설명한다.

    신의 류의태 선생 살아 생전 한약 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일명:약물통)의 약수는 돌너덜 아래의 서출동류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전구형왕릉 찾아가는 길= 창원- 남해고속도로-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 산청IC - 금서면 화계리 - 전구형왕릉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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