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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2) 유안진/지란지교를 꿈꾸며

  • 기사입력 : 2016-05-13 14:26:49
  •   

  • J!
    우리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봄이다.
    아니지. 어느덧 여름 가까이, 그것도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 가까워지고 있구나.
    우리가 준비도 없이 맞이한 서른두살의 나날들이 말이야.
    부옇고 탁하기만 했던 회색은 은은한 파스텔톤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온통 상큼한 연둣빛으로 가득하구나.
    12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도 봄이었잖아.
    지금보다 훨씬 철이 없었고, 그렇기에 훨씬 신선했고, 때문에 훨씬 혼란스러웠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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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걸까.
    좌절된 꿈을 안고 있다는 걸, 웃고 있지만 사실은 무척 외롭다는 걸.
    스무살이라는 나이가,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이 너무 큰 옷을 걸친 것처럼 버겁기만 하다는 걸.
    친해지고는 싶었지만 대면대면하게 지내던 우리가 서로를 제대로 알아본 건 2004년 늦여름이었나보다.
    너의 부친이 너무나 급작스레 세상을 버리셨던 그 때.
    며칠동안 학교도 나오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던 너를, 나는 무작정 찾아갔었다.
    토성동 대학병원 영안실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수소문해 국화를 사들고 찾아갔지만 이미 한발 늦어버린 후였지.
    발인은 그날 새벽이었고, 나는 병동 난간에 기대서서 꺼져있는 너의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를 넣었다.
    '늦어서 미안해.'
     
    그날 이후 너는 완전히 달라졌지.
    새침하고 까칠한 여대생이었던 너는 매우 사려깊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매사에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썼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식사 전에 꼭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지.
    외동딸인 네가 어머니와 함께 단 둘이 겪어야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네 삶을 뒤흔드는 일생일대의 사건인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너를 그토록 깊고도 쓰라린 회한에 젖게 했는지, 사실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
    하지만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네가 알을 깨고 밝은 바깥세상으로 나왔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단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가까워졌지.
    같이 밥 먹고 같이 걷고 같이 책을 읽고 같이 음악을 듣고 같이 웃었지. 거의 매일을.
    우린 마산과 부산, 갯가에서 태어나 물고기를 먹고자란 드세고 당찬 여자애들이었지만
    사실 툭하면 눈물을 쏟는 여리고 약한 영혼이기도 했잖아.
    그걸 우리 둘은 너무나 잘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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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우리가 더 돈독해질 수 있었던 건 둘 다 전공학과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건 단지 적성에 맞지 않은 학과를 선택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였지.
    우리는 동기들과 함께 교육학을 전공했고, 장차 교사가 될 준비를 해나갔지만, 왠지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잖아.
    동기들이 죽어라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뻔질나게 서점을 드나들며 신간 시집이나 소설책에 곁눈질하기 바빴고
    너는 툭하면 사회과학대에 숨어들어가 심리학과 수업을 기웃댔지.
    돌이켜보면, 이미 거기엔 수년 뒤에 펼쳐질 우리 삶의 면면이 복선처럼 깔려 있었는지도 몰라.
    드라마 시나리오에 종종 등장하는 까메오나 독특한 물건 같은, 교묘한 장치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동기들보다 조금 먼 길을 우회해 각자에게 맞는 옷을 찾아입게 된 거 같다.
    나는 이렇게 글을 써서 먹고 살게 되었고
    너는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
    J! 우리 다른 건 몰라도 말이야. 이건 참 잘한 일 같지 않니?
    우리 내면의 욕구를 무시하지 않았던 것,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 그런 불확실성을 두고도 있는 힘껏 서로를 격려했던 것.
    그래. 20대 중후반, 각자의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활짝 피어나던 꽃다운 날에도 우리는 늘 함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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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살 되던 해, 너는 결혼을 했구나.
    내가 내 인생을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편입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중대기로에 서 있던 그 무렵,
    너는 과감하게 결정을 봐버렸더구나.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걸치고, 가장 비싼 구두를 신고, 유독 천장이 화려하고 높던 너의 결혼식장에 들어가던 순간,
    스냅사진을 찍기 위해 어깨가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신부대기실 가운데 서 있던 네 뒷모습을 보는 순간,
    왜 난데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지.
    하하하, 소리내어 크게 웃어도 더할 나위없이 좋을 날에 말이지.
    네가 한손엔 부케를, 한손엔 아버지 대신 삼촌의 손을 잡고 첫걸음을 디디던 순간,
    엉엉 목놓아 울고 싶었던 건 무슨 마음이었는지.
    J. 그건 대체 무슨 심정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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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J.
    우리는 또 함께 손을 잡고 혹독한 30대 초반을 견뎌야했다.
    네가 그리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있을 동안
    나는 내가 유지해나가고 있는 관계에 힘겨웠고
    네가 길지도 않은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로 어렵게 마음 먹었을 때
    나 또한 영원하리라 믿었던 관계에 끝을 보았다.
    꼬챙이처럼 바싹 마른 너를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봤고, 시시때때로 무너지던 나를 네가 일으켜세웠지.
    그래. 지난 1년 동안 너도 나도 많이 아팠고, 그 추웠던 겨울의 여운은 아직 우리를 완전히 비껴간 것 같지 않구나.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애타게 봄을 기다리고 있나보다.
    혹여 술에라도 취하면 흐트러질까, 누군가에게 기대면 또 상처 받을까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말이야.
    하지만 J. 창밖을 한번 봐.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 또 다시 봄을 맞고 있다.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전혀 다른 모습과 마음으로.
     
    J!
    어제 저녁에 말이야.
    베란다에 내어둔 자그마한 화분에서 앙증맞은 꽃봉오리가 정확하게 여섯 송이나 올라온 걸 봤다.
    막 터질듯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그 안에 짙은 분홍빛 꽃잎이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것 같았지.
    그리고 그 옆자리엔 클로버가 꽃대를 세워 또다른 꽃을 한송이 피우고 있었다.
    그건 어린 아기의 손톱만큼이나 작고 여리고,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샛노란 빛을 띠고 있었지.
    지난 가을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화분에 뿌리를 내린 클로버 같았는데,
    잡초로 여겨 뽑아 버리려다가 그냥 두었던 거였거든.
    그러니까 그 손바닥만한 화분 안에서 그것들은 각자의 빛깔로, 각자의 모양으로, 각자의 존엄성을 갖고 사이좋게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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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전에 네가 한번 말한 적 있었지.
    우리가 전혀 뜻에 맞지도 않은 대학에, 학과에 진학해 외롭게 방황했던 건
    나는 너를, 너는 나라는 존재를 알아보기 위해, 평생 마음을 나누는 친구로 곁에 두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그래. J.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좋으면 좋은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우리는 지난 12년을 함께 견뎌왔으니까.
    있잖아, J. 우리는 다시 피어날 거야.
    20대에 피워 올렸던 것처럼 그렇게 싱그럽고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좀더 성숙하고 원숙한 꽃송이를, 조금 천천히 그러나 더  향기롭게 말이다.
    자그마한 이 시공간 속에서 너는 너만의 분홍빛으로, 나는 나만의 노란빛으로.
    J! 그러니 우리 서로를 의지해 씩씩하게 이 길을 걸어가보자.
    우리 앞에 펼쳐질 많은 것들, 좋거나 싫거나 아름답거나 쓰라리거나 애닯거나 지리멸렬할, 그 모든 것을 담담하고 의연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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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략)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친구와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는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쳐 주고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며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되
    미친듯이 몰두하게 되길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도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우리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은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창문을 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면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손이 작고 어리어도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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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이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니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 유안진/지란지교를 꿈꾸며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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