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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19) 황석영/오래된 정원

  • 기사입력 : 2016-01-06 18: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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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 한 남자가 있어요. 이름은 오현우 입니다. 나이는 삼십대 초중반 정도. 그는 형사들에 쫓기는 신세 입니다. 지금은 군사독재 시절이고,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을 했거든요. 그는 자신이 수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어둠을 틈타 본가로 숨어듭니다. 그리고 눈물을 훌쩍이는 홀어머니께 큰절을 올린 뒤 재빨리 서울을 뜹니다.

    곧 그의 얼굴사진이 ’수배’ 딱지를 붙인 채 전국 방방곡곡에 뿌려지고 일간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립니다. 자연히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하겠지요. 매서운 감시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는,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어갈만한 따뜻하고 포근한 도피처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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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장면.
    여기 한 여자가 있어요. 그녀의 이름은 한윤희 입니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정도. 그녀는 어느 소읍의 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랍니다. 소위 ’빨갱이’였던 아버지를 두어 오랜시간 반목했지만 끝내는 아버지를 가슴으로 이해한, 알고보면 순정파지만 겉으로 보기엔 꽤 소탈하고 당돌한 여자예요.

    그녀는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사회문제에 눈을 뜹니다. 그러나 앞에 나서서 화염병을 던지거나 독재타도를 외치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도망중인 운동권 투사들에게 시골마을 기슭에 있는 자신의 작은 집과 아틀리에(작은 마당이 있는 초가집일 뿐이지만요.)를 도피처로 제공하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맞아요. 바로 그 남자, 오현우가 당장 필요로 하는 도피처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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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장면.
    그래요. 그런 이유로 오현우와 한윤희는 어느 소읍의 허름한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막 퇴근을 한, 하늘하늘한 봄 코트를 입은 한윤희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오현우는 어느 날 그렇게 마주치게 됩니다. 남자는 급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피할 처마가 필요했고, 여자는 그것을 그에게 줄 수 있었죠. 그건 그들의 지난날을 거쳐간 수천수만번의 기회와 선택, 그리고 현재의 우연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그들이 놓치거나 붙잡았던 많은 것들, 스쳐갔던 많은 경험과 사건들이 이 만남을 불러올거라곤 단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우리는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을, 주저없이 ’운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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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장면.
    두 사람은 한윤희의 집이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 들어가요. 그리고 몇 안되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오현우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이고, 한윤희는 고시생인 약혼자를 뒷바라지하는 마음 착한 처자라고 말이죠. 두 사람은 서점에서 법전을 여러 권 사다가 책꽂이에 꽂아두고 작은 두레밥상에 소박한 식사를 차려 이마를 맞대고 먹습니다. 그럴 듯하게, 가난하지만 희망을 꿈꾸는 연인들처럼 보여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이 있죠. 잘 모르는 여자랑, 혹은 남자랑 함부로 밥 같이 먹지 말라고. 같이 밥을 먹고나면,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정이 싹트는 거라고. 아마도 그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봅니다. 서먹하고 조심스럽던 두 사람은 그날 밤 저녁을 지어 함께 먹은 다음부터 부쩍 몸과 마음이 가까워졌어요. 게다가 그 집엔 이부자리도 단 한채뿐. 두 사람은 촛불을 켠 방 가운데 이불을 펴두고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양쪽 벽에 기대어 대화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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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장면.

    ’윤희가 문득 내게 물었다.
    “앞으로 뭘 할 거예요?”
    “다시 활동해야죠.”
    “아니… 그런 거 말구,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녜요?”
    “아주 오래 전에 시를 써볼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요?”
    “도피중이죠.”
    “기억 나는 거 있으면 한번 외워봐요.”
    “뭘 말요…?”
    “시라는 물건 말예요.”
    “기억나는게 몇 구절 있지요.”
    “읊어봐요.”

    바람에 불려 대기가 젖는다.
    내가 봄비라고 이름짓는다.

    “그게 다예요?”
    “또 있습니다.”

    봄비,
    그러나 감자밭을 적시기엔 아직 적다.

    “괜찮은데요? 누워서 얘기해요. 목이 아프잖아요.”
    나는 그녀의 옆에 두어 뼘쯤 떨어져 눕는다.
    우리는 천장에 촛불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반듯이 누워 있었다.’ - 창작과비평사/황석영/’오래된 정원’ 상권 10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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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장면.

    짐작했겠지만, 두 사람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읍내에 장을 보러가기도 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놀러도 가고, 시간이 날 땐 한윤희가 오현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그녀가 그에게 제공한 허름한 초가집은 정말 따뜻하고 포근한 도피처가 되었던 겁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하고 있는 사랑 때문이었죠.

    하지만 한윤희는 늘 불안했어요. 그는 할 일이 있는 사람, 온전히 그녀에게만 마음을 줄 수 없는, 언젠가는 그녀를 떠날 사람이었거든요. 주말에 김밥을 말아 소풍가는 마음으로 뒷산 정상에 오르면, 한동안 그의 눈은 사랑하는 그녀가 아닌 저 먼 세상에 붙박여있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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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장면.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집니다. 오현우는 한윤희에게 서울에 잠깐 다녀와야겠다고 말합니다. 동지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동향을 알아보러 가야겠다고요. 그가 그들의 작은 도피처를 나서던 날 밤, 세찬 장맛비가 왔습니다. 한윤희는 우산을 받쳐들고 오현우를 배웅하러 버스 정류장에 나갑니다. 가지말라고, 같이 있자고, 당신이 꼭 옆에 있어야할 이유가 생겼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를 보냈어요. 오현우는 훗날, 어둠 속에서 수천번 수만번 반복해서 그날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되돌리게 됩니다.

    비바람에 마구 흩날리던 그녀의 흰색 치마와 고무신, 차창에 흐르는 빗물에 흐려지던 그녀의 얼굴을요. 며칠 뒤, 오현우는 검거됩니다. 잠복하고 있던 형사에게 덜미가 붙들렸죠. 그리고 그는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그는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까맣게 몰랐죠. 한윤희의 뱃속에 겨자씨만한, 자신의 피가 흐르는 생명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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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처음 읽은 건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2~3년씩 간격을 두고 서너번을 더 읽었고, 임상수 감독이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오래된 정원’도 봤다. 이 책을 읽으면 눈물이 났고 상처가 따끔따끔 거렸고 한참을 그러고 나면 끝내는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아주아주 슬플 때, 슬퍼서 숨을 쉬기도 힘들 때, 이 책을 꺼내 읽는다. 나도 한때 한윤희처럼, 세차게 홀로 비를 맞고 서 있던 어떤 사람에게 내 우산을 기꺼이 내어주었었다. 첫눈에도 그 사람은 너무 지쳐보였고, 아파보였기에 내가 도피처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바보같이, 나는 다른 계산을 할 줄 몰랐다. 만약 그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리고 이 글이 내가 하고픈 말을 아끼고 아껴 쓴 글이라는 것을 눈치챈다면, 꼭 알아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힘겨워하며 방황하던 시절 내가 당신에게 잠깐 내린 봄비였다면, 그러나 결코 충분치 않은 비였다면, 미안했다고. 다음, 이 다음, 어느 때가 될지 모르는 이 다음 다음에, 혹여 그런 기회가 다시 온다면, 감자밭을 적시고도 남을 넉넉한 비가 되어주겠다고.

    P.S- 운명의 연인 오현우와 한윤희는 어떻게 되었는지, 일상탐독 독자 여러분은 매우 궁금할 것이다. 이번 주말 독서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시길.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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