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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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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7) 천운영/ 바늘

  • 기사입력 : 2015-06-04 17: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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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년 동안 많은 취재원들을 만나왔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취재원들의 나이와 하는 일, 관심사는 모두 달랐고 그 스펙트럼이 다양한 만큼 그들이 기자를 대하는 태도도 각각 달랐다. 어떤 이는 돈을 찔러주려고 했고, 어떤 이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거나 진귀한 물건을 사주려 했고, 어떤 이는 지식과 연륜을 이용해 훈계를 하거나 설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자신이 서 있는 입장에 유리하도록 기사를 써달라는 것. 내가 가진 작고 얇은 펜대를 자신을 위해 굴려달라는 것. 그것 뿐이었다. 취재원들은 시종일관 목적과 지향점이 뚜렷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고, 그런 일방적인 소통방식이 대게 그러하듯, 소기의 목적이 달성됨에 따라 한두 차례 만남이나 전화통화로 인연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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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 취재원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띠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거나 끝맺는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부류가 ‘신문사 회장, 상무, 편집국장이랑 잘 안다’ 혹은 ‘모 국회의원, 도의원, 시장, 군수가 친한 친구다’ 등의 이야기를 서두나 말미에 고명처럼 얹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누구와 얼마나 막역하게 친분을 쌓는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의도를 다르게 왜곡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잘 대해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나이가 많든 적든, 사회적 지위가 있든 없든, 그가 빈곤하고 빈한한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 나오는 걸음마다 조금 쓸쓸한 생각이 깃들었다. 왜 타인의 힘에 기대나요? 당신 스스로 당신을 지킬 외피는 어디에 있나요? 하는 물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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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를 그려달라고 했다. 남자가 가져온 인쇄물은 거미라기보다는 커다란 홍게처럼 보였다. 새를 먹는 골리앗거미.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의 이름이다.
    “이 완벽한 대칭 좀 봐. 꼭 반으로 접어 찍어낸 것 같지 않아?”
    남자는 인쇄물 속의 골리앗거미를 노려보며 말했다.
    “똑같이, 똑같이 그려줘. 몸을 덮고 있는 이 보송보송한 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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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원하는 것은 거미의 털이나 대칭으로 잘 뻗은 다리가 아니다. 남자는 협각류의 외피를 원한다. 거미가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에게 위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단단한 외피를 획득한 탓이다. 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 한다. 인간의 살갗은 협각류보다는 과일에 가까워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 침대에 수건을 까는 동안 남자는 웃옷을 벗고 거미 사진을 이리저리 대보며 문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다. 나는 묵묵히 바늘을 내려놓고 소독솜으로 남자의 허벅지와 내 손을 닦아낸다. … 거미나 전갈 따위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남자는 두려움을 침묵으로 이겨내지 못했다. 남자에게 독한 꼬냑을 얼음 없이 한잔 가득 따라준다. 내 앞에서 약이나 대마초는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협각류의 외피를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 바늘을 들고 남자의 무릎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거미의 몸통을 그리기 시작한다. 몸통은 정팔각형 모양이다. 몸통 및 꼬리 부분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투명한 실이 한없이 뽑아져 나올 것 같다. 네 쌍의 보각(補角)은 남자의 말대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바늘 끝을 따라 거미가 조금씩 형태를 드러낸다. … 살에 꽂는 첫 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 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이것을 첫 이슬이라고 부른다. 거즈로 피를 찍어내고 잉크의 농도를 확인한다. 일단 첫 땀이 성공적으로 떠지는 것을 확인하면 그때부터 내 손은 빨라지기 시작한다. 속도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고른 색을 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 인디아 잉크과 징크 옥사이드로 외피를 완성한다. 크롬 그린이 합류되면서 거미는 이제 완벽한 외골격을 갖춘다. 골리앗거미는 풍요로운 식사를 마치고 밀림 속에서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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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집년들이 보면 환장하겠는 걸?”
    남자가 내 어깨를 치며 말한다.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내 몸의 모든 기운이 거미의 촉수로 빨려 들어간 것 같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문다. 남자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암홍색 골리앗거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남자는 이제 손바닥만한 외피를 얻었다. 남자가 손바닥만큼 더 강인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 창작과비평사/천운영/‘바늘’ 1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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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와 처음 만난 건 지난해 겨울 어느 날이었다. K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내 이야기를 기사로 써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나이 지긋한 어른인 것 같아 단칼에 내칠 수가 없어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K를 찾아간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K는 나이 일흔이 넘은 만학도였다. 그는 이십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에게 밥 사먹이고 술도 사주며 함께 공부해 어렵게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막 졸업장을 받은 참이었다. 그는 말했다. “졸업장을 받은 날부터 늙은이가 이 악물고 노력해서 대학 졸업장을 땄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어 견딜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김 기자. 내 이야기 좀 신문에 내 줘”. 그는 혁혁한 공을 세운 퇴역 장성처럼 졸업장을 들어보이며 겸언쩍게 웃었다.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솔직함이 밉지가 않았다. 나는 K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인 뒤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 다녀야 했던 젊은 시절과 아내와의 짧았던 결혼생활,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서 아이를 키웠던 세월, 야심차게 손을 댔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 여러 사업들, 그 많은 부침들을 겪으며 ‘내 운명은 왜 이럴까’하며 고민했던 나날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경청하고 수첩에 몇자 끄적이긴 했지만 솔직히,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애환 없는 사람 없듯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K가 눈물을 보이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아내를 저세상에 보내고 아이를 혼자 돌보게 된 대목에서 K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는데, “미안해요. 갑자기 내가 왜 이러나 …” 라며 급히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싫지가 않았다. K의 주름진 얼굴을 흐르는 눈물과, 그가 눈물을 감추는 모양새에는 언어로는 명확히 표현해낼 수 없는 어떤 감동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요. 그냥 우세요. 저도 울래요.” 이상한 날이었다. K의 이야기가 끝난 뒤 나는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한 친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을. 부모님에게도 드러내 본 적 없는 속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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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인종이 길게 두 번 울린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문을 연다. 801호 남자다. 남자는 문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다. 혹시 나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천천히 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오도록 길을 비켜준다.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로 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오래 전부터 이 집에 드나들었다는 듯 망설임이 없다. 그리고는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소파에 기대앉아 나를 바라본다. 내가 문을 닫고 옆에 가 앉기까지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서 느닷없이 말을 시작한다.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들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한 표정이지. 왜 그런 표정인지도 알아. 지난달에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가 나한테 장검을 보여줬어. 팔뚝에 새긴 장검 말야. 그 사람은 알고 있는 거야. 무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당신처럼, 아름답게 생긴, 사람들은, 문신을 하지 않아.”
    “아름답다고? 내 모습을 봐. 죽은 사람처럼 하얀 이 피부 좀 보란 말야. 나는 언제나 허약하고 소심해보인다구. 난 그게 싫단 말야!”
    그는 눈을 지릅뜨고 나를 쏘아본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옅은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연한 갈색을 띠는 그의 눈은 꼭 고양이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의심을 잔뜩 품은 눈. 순결을 바치기 직전에 소녀가 가지는 그런 눈. 그는 오래된 치부를 드러내듯 조심스럽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 고참들은 내가 곱살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심한 얼차려를 주곤 했어. 난 정말 꿋꿋하게 이겨냈어. 그런데, 어느 날 내 옆에서 잠자던 고참이 내 바지를 벗기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난 꼼짝도 할 수 없었어…”
    “……”
    “그때 알았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두 가지. 거세를 하거나 강해지는 것.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 강해지는 것 밖에 없어. 넌 그걸 해줄 수 있잖아.”
    “내가?”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줘. 칼이나 활, 미사일, 비행기 뭐든.” - 문학과지성사/천운영/‘바늘’ 3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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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K의 비밀을 알고 K는 나의 비밀을 안다. 그 사실이 썩 나를 기분좋게 한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취재원들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회사 임원을 안다거나 정치인과 친분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그들이 빈곤하거나 빈한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인간은 본래가 연약하고 미숙하고 한없이 보드라운 존재라는 것.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힘 있는 대상을 지향할 뿐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을 절대적으로 빈곤하거나 빈한하다고는 몰아세울 수 없다는 것. 그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 거다. K는 대학 졸업장이라는 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이를 일흔이 넘게 먹어도 여전히 아기 피부처럼 말랑말랑해 상처나고 멍들기 쉬운 부분이 그에겐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무기가 필요하다. 그게 칼이나 총, 창이나 방패 같은 구체적이고 즉물적인 무기의 형상이 아닐 뿐 내게도 내 내면의 밀림에 사는 골리앗거미를 살찌울 무언가가 늘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평생토록, 선천적 연약함을 가려줄 위압적인 문신이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취재원들은 유력한 인사들을 언급하는 그런 완곡한 어법으로 내게 호소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의 뾰족한 펜대 끝에 붙은 얇은 ‘바늘’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잘 썼든 못 썼든, 기사로 그들의 몸에 딱딱한 협각류의 외피나 빛나는 장검을 서툴게나마 그려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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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매일 저녁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게 두 번 벨을 누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내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발끝으로 사뿐히 걷는 소리와 문 앞에서 내쉬는 깊은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 문학과지성사/천운영/‘바늘’ 31페이지

    단편소설 ‘바늘’은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곱추에 뚱뚱한 몸, 간질병에 말까지 더듬는 추한 외모 때문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여자 주인공이 바늘을 이용해 강해보이고 싶은 욕망을 가진 남자들에게 자신의 외모와 대비되는 아름다운 문신을 해주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남성적이지만 동시에 여성적이고 관능적이지만 이지적이기도 한 소설이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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