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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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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그렇게 된 나의 인생- 김용택(시인)

  • 기사입력 : 2024-06-20 19: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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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 진다. 나는 걸어서 마을 밖으로 나간다. 마을에서 떨어진 길가 모정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인사를 하며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데 선생님 제자라고 해서 놀랐다. 그냐? 하며, 반갑게 악수하였다. 자기 이름을 말하며 수줍어한다. 제자 아버지는 허리가 몹시 굽었었다. 짧은 머리에 유순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어떤 때는, 영화 속의 동학농민군들이나 흑백사진 속 독립군 단체 사진 얼굴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공동의 신념이 얼굴에 스쳐 갈 때도 있었다. 달구지로 나무도 해 나르고 보리도 벼도 실어 날랐다. 나는 그 어른이 어쩐지 좋았다. 제자는 시내버스 운전한단다. 정년이 6년 남았단다. 내가 아버님을 속으로 좋아했다고 말했다. 제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봤다. 사회적인 공분을 살 만한 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선량한 시민의 얼굴이다. 우리 집에 한번 들러라. 아버지 사진이 나온 책이 있다고, 했다.

    조금 걸어갔더니, 다른 제자가 비닐하우스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저 제자 아들도 가르쳤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아이를 닮은 아이가 있어서 사진 찍어 준다고 했더니, 길로 쪼르르 뛰어 올라왔다.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을 말하고는, 아버지가 힘들게 지었단다. 내가 웃었다. 아이는 2학년이다. 자기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잘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다. 네 아버지와 네 큰형을 가르쳤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했다. 저기, 간다고 했다. 비가 온다고 했냐고 내게 물었다. 모르지만 비는 올 것 같지는 않다고 하늘을 보며 말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또 물었다. 우리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내용은 별로 없다. 오랜만에 2학년 학동과 몸짓 손짓 발짓을 해가며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했다. 둘이 크게 웃기도 했다. 막힌 데 없이 이어지는 유쾌하고 활발한 담소(?)다. 나는 2학년을 20여 년 가르쳤다. 그럼, 나는 이제 그냥 가보겠다고 했다. 또 어디까지 가냐고 했다. 그러다가 아, 아까 말했지, 하며 할아버지는 어디 사냐고 했다. 저기 산다고 우리 마을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언제 놀러 오라고 했다. 그런다고 하는 아이에게 나, 이제 가도 되냐고 확실하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냐고 또 물었다. 귀여워서 또 사진을 찍었다. 두 손가락을 펴서 브이 자를 만들어 눈에 대고 이이이, 하고 억지로 웃다가 진짜로 히히 웃었다. 앞니가 모두 빠졌다. 그때 아이 아버지가 선생님, 그 녀석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으니 그만 가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바쁘신 분이다. 그만 보내드려라. 그럼 간다고 하고 빨리 걸어갔다.

    돌아오면서 보니, 아이가 아버지 트랙터에 타고 있다가 큰 소리로 지금 아버지가 창고 만든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이 형이 생각났다. 이 아이 형은 미니 포클레인도 운전할 줄 알았었다. 아버지의 잔심부름은 다 하였다. 나는 하교할 때 아이에게 주려고 이따금 아이스케키를 사 들고 가기도 했다. 빈손으로 만난 어느 날 돈도 2000원 준 기억이 난다. 그럼 나 가볼게, 안녕! 근데 할아버지 집이 어디예요. 아까 말했어도 또 저기 저쪽 산 아래 있어. 언제 놀러 와, 그랬더니, 큰 소리로 우리 형 알아요, 한다. 내가 형을 가르쳤다고 나도 크게 말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볼게. 오늘 정말 반가웠어. 잘 있어. 날이 어두워졌다. 강둑길 풀밭에 밤바람이 불었다. 이것은 나의 인생! 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아이가 크게 손을 흔든다.

    이 길은 나의 길이다.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31년, 나는 이 강물을 거스르고 때로 따르며 순응과 거역을 배우고 자유를 얻는다. 지금도 나는 이 길을 걷는다. 나는 이렇게 이 길에서 하얗게 늙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자다 깼다 새벽이다. 창가에 달이 떠 있어서 놀랐다. 달이 나를 보고 있다. 좋아하였다. 아까 본 아이 생각이 났다. 나는 조각달 오목한 곳을 가만히 베고 잔다. 새는 소쩍새, 밤에 새가 운다. 나는 저 새 소리로 내게 주어진 삶을 괴로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고쳐 눕고, 다시 잔다.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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