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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산청 백운계곡

너럭바위는 구름을 닮았고 물줄기는 하늘을 담았다
지리산 품속 장쾌한 물줄기는 희고 너른 암반을 무대 삼아
폭포와 담과 소로 끝없이 몸을 바꾸며 현란하게 춤춘다

  • 기사입력 : 2011-07-2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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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군 단성면의 백운계곡은 지리산의 맑은 물이 흐르는 때 묻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바위 골짜기를 오르면 이름 모를 담과 소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리산의 품속에 있지만,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 대원사계곡, 뱀사골 등에 가려 그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곳 중 하나가 백운계곡이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뻗어나와 동쪽으로 자세를 낮추며 달리던 산줄기는 경호강 인근 웅석봉에서 우뚝 솟아난 뒤, 달뜨기 능선을 따라 수양산과 시무산으로 흘러간다.

    백운계곡은 장쾌하게 뻗은 이 산줄기 중 달뜨기 능선에서 발원, 오른쪽에 수양산과 시무산, 왼쪽에 백운산을 두고 폭포와 담의 향연을 펼친 뒤 덕천강으로 이어진다.

    중부고속도로 단성IC를 빠져나온 뒤 지리산 중산리지구로 방향을 잡아 20번 국도를 타고 10여 분을 달리다 보면 왼쪽에 덕천강을 만난다. 강변을 따라 2~3분을 더 달리면 오른쪽에 백운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계곡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놓치지 않는다.

    초입에서 실개천을 따라 2㎞ 남짓 더 들어가면 영산펜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끝나고 골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백운계곡은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자주 찾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명 선생이 인근의 덕산, 즉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머리를 식힐 겸 산놀이를 했을 법하다.

    경관이 빼어난 곳이라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를 볼 수 있다. 백운계곡도 예외는 아니다. 영산펜션 간판 아래 바위에는 ‘龍門洞天(용문동천)’이 새겨져 있고, 펜션 안쪽에는 ‘白雲洞(백운동)’이 있다. 또 계곡 왼쪽의 임도를 버리고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가다 보면 嶺南第一泉石 (영남제일천석), 登天臺(등천대) 등의 각자를 잇따라 만난다.




    ‘동천(洞天)’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 사전에서 적고 있다. 지리산에는 이곳 말고도 하동군 화개면에 쌍계사 아래에 화개동천이 있다.

    여러 각자 중 남명 선생과 관련 있는 것으로는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 之所)’가 사실상 유일하다. 각자는 남명 선생 사후 300여 년이 지난 19세기 말 유림(儒林)들이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며 왔던 곳이라는 의미다.

    ‘푸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는 시를 이곳에서 지었다는 말도 전해지지만, 산청군의 조종명 문화관광해설사는 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럼 백운동과 백운계곡의 백운(白雲)은 글자 그대로 흰구름일까. 여러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봤다. 한결같은 대답은 구름이 아니라 계곡의 암반 색깔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물길을 타고 오르는 수고를 하다 보면, 백운계곡의 암반을 왜 흰구름에 비유했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계곡은 폭포와 담(潭)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한 길 정도로 추정되는 짙푸른 담에는 두세 사람 키높이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폭포를 간신히 오르고 나면 맑은 물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너르고 하얀 빛깔을 띤 암반을 만난다. 또 암반 위에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담과 그 길이만큼 폭포가 우뚝 서 있다.

    백운계곡에는 백운폭포와 오담폭포, 칠성폭포, 다지소(多知沼), 청의소(聽義沼) 등 수많은 폭포와 소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지만, 백운폭포와 다지소 등 몇몇을 제외하면 어느 이름이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이에 대한 표지판도 없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 모르고 하는 것이 대수인가.



    ▲ 인근 가볼만한 곳 산천재

    남명 선생이 61세 되던 해에 덕산으로 들어와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오건, 정구, 김우옹, 최영경, 곽재우 등 수많은 제자들에게 경(敬)과 의(義)를 바탕으로 한 실천철학을 가르쳤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됐지만 1817년에 중건됐으며, 부속건물로는 선생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이 있다. 산천재 마루 위 정면과 좌우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산천재 인근의 시천면 원리에는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士林)들이 건립한 덕천서원이 있다.

    글=서영훈기자·사진=김승권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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