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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30여 년간 토종 종자 보존·보급 이영문씨

“토종은 이 땅 보존하고 환경 지키는 데 필요한 것”

  • 기사입력 : 2011-07-0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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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여 년간 토종 종자를 보존·보급하고 있는 이영문씨가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 외딴섬 별학도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 토종 땅콩 종자를 살펴보고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맞는 말이고, 또 그래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매번 똑같은 콩이고 팥이 아니다.

    식물은 환경과 주변의 간섭을 받다 보면 서서히 변한다.

    특히 소출을 목적으로 종자를 개량하다 보면 본래의 모습과 점점 멀어진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고유의 먹거리 ‘토종’이라고 믿고 또 먹는다.

    토종(土種)이 아닌 변종(變種)은 사람의 입맛만 속이는 게 아니다.

    그것을 재배하는 데 기계를 들이고, 농약과 비료를 쓰게 해, 농사 비용을 높이고 자연과 환경을 파괴한다.



    우리 것을 발견하다

    “지금 우리의 먹거리 중 토종은 하나도 없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의 외딴섬 별학도에서 만난 이영문(58)씨. 첫마디부터 비애감이 묻어났다. 30년이 넘게 우리나라 작물의 토종 종자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외길을 걸어왔지만,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이씨는 “여전히 토종은 기를 펴지 못한 채, 변종이 판을 치고 있다. 토종이란 단지 ‘먹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보존하고 환경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며 “지금이라도 토종을 보존하지 않으면 고유의 식물 유전자는 물론 우리의 자연까지 잃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씨가 토종 종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대 후반이다. 하동군 옥종면에서 농기계 관련 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농사일에도 기웃거리게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농사와 기계는 가까워지면 질수록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우쳤다.

    농업을 기계화하면 일이 수월해지면서 생산비도 적게 들고, 소출이 늘어나야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이씨는 “농기계가 농사를 돕는 게 아니라 망치고 있고, 이 과정에서 고유의 농사법에 적합한 토종 종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회상했다.

    이때부터 이씨는 토종 종자를 구해 고유의 농사법으로 시험재배를 시도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토종 종자를 이용한 토종 농사법이 기계를 이용하고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는 농사법에 비해 전혀 소출이 뒤떨어지지 않았다.

    확신은 강해졌다. 이씨는 토종 종자를 보존하고 보급한다면 소출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이고, 농약이나 비료를 쓰지 않아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이영문씨가 토종 종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산골짜기로 찾아들다

    옥종면의 한 산골짜기를 토종 종자를 심고 생산하기 위한 장소로 정했다. 1700평 정도로 작았지만, 사람들의 손길을 비켜날 수 있는 곳이라 이곳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토종 종자를 구하기 위한 이씨의 고생이 시작됐다. 현대화된 농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종자를 찾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이씨는 “토종 종자가 있을 만한 곳에는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이때 종자뿐 아니라 농사일을 오래 하신 어르신들에게 고유의 농사법과 종자에 대한 지혜도 함께 얻었다”고 말했다.

    벼·보리·밀·콩 등 주곡을 위주로 50여 종이 있던 이씨의 옥종 골짜기에는 이내 180여 종의 토종 종자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이쯤에서 의문이 들었다. 토종 종자라고 구한 것이 혹 변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씨는 “종자를 구해 심고 수확한 뒤, 또 그 종자를 받아 3~5년간 반복해서 심어보면 알게 된다. 토종은 주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고유의 유전자를 그대로 간직하는 특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토종이 아닌 변종은 수년을 반복해서 심을 경우 해마다 성질이 변한다는 것이다.



    ‘태평농법’을 알리다

    이씨의 토종 종자와 토종 농법은 1994년 ‘태평농법’으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태평농법’이란 땅을 갈지 않은 채, 씨를 바로 뿌리는 농법 즉 ‘무경운 직파농법’이다.

    ‘태평’이란 미생물, 곤충, 사람, 환경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로 ‘태평성대’에서 따온 글귀다.

    이씨는 “흔히들 알고 있는 농작법이란 게 남의 나라에서 들여온 것이다. 농기계를 사용하고, 싹을 따로 틔워 이식하는 방식은 우리 고유의 농법이 아니다”며 “특히 쌀의 경우 물을 채워야 된다고 알고 있지만 잘못된 상식이다”고 말했다.

    이씨는 밀을 수확한 뒤 6월 중에 볍씨를 뿌려 수확해 보니 결과가 좋았다. 물론 농약이나 비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농법을 사용했다.

    진주 경상대학교와 함께 두 필지를 시험장으로 삼아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씨는 보리, 밀, 콩 등에도 ‘태평농법’을 적용해 성공을 거뒀다. 이씨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 토종 작물의 재배시기가 따로 있고, 농사지도법도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평농법’의 성공으로 구경온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동우회를 결성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현재 ‘태피들’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9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씨가 보급하는 토종 종자를 받고 농사법을 전수받아, 토종 작물을 재배하면서 토종의 소중함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별학도로 옮겨오다

    2000년, 이씨는 옥종면을 떠나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 외딴섬 별학도로 왔다.

    토종 종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자 산골짜기는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발걸음이 잦아들어 손을 타기도 하는 데다. 무엇보다 보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곳 2700평을 빌려 수년에 걸쳐 옥종면의 토종 작물들을 옮겨왔다. 중국까지 오가는 고생 끝에 보존 종자가 800여 종을 넘었다.

    이씨는 이곳에서 온난화 대체작물을 토착화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외국 토종을 우리나라 토종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으로, 중국과 뉴질랜드 등지에서 80여 종의 종자와 묘목을 들여와 시험재배를 했다.

    이씨는 “이 중 과실과 채소 등 6종은 성공을 거뒀다. 외래 식물이라도 토종화를 한다면 먹거리도 풍부해지고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며 “우리 농업이 토종 종자가 부족해 종자를 사서 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토종 종자에 관심을…

    이씨는 “우리 농업은 너무 우량종에만 함몰돼 있다. 토종 종자를 이용한 전통농법으로도 충분히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큼 정부나 학계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며 “토종 종자 보급이야말로 후손들의 삶과 자연을 지키는 일이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토종 종자가 보다 많이 확산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농촌진흥청, 도 단위 농업기술센터 등에 종자를 기증해 왔다.

    이씨는 “어떻게 활용할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보관용으로 그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정부가 나서서 보급해 준다면 좋겠다”며 “이를 위해 이들 기관에 토종 종자에 대한 애착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 영입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별학도도 이미 넘쳐나고 있다. 이씨는 이웃한 미섬 7000여 평을 10년간 임대해 토종 종자를 생산하고, 온난화 대체작물 토착화를 시험할 계획이다.

    이씨는 “토종 종자를 보급하는 길은 아직 먼데 점점 힘이 든다. 공간도 부족한 데다 개발로 인해 이제 섬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며 “편안하게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중국으로 옮겨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속내를 털어났다.

    중국행은 지난해부터 추진해오던 것으로, 이미 그쪽 지방정부와 대학과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우리 것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 땅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이씨의 얼굴이 유난히 주름져 보인다.

    글= 이문재기자 mjlee@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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