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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귀화 외국인 경찰관 도내 1호 주지강씨(김해중부경찰서)

“사랑 찾아온 대한민국에서 사람 돕는 수사관 되는 게 꿈”

  • 기사입력 : 2011-06-2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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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내 1호 ‘귀화 외국인 경찰관’인 김해중부경찰서 주지강 경장이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사랑을 위해 혈혈단신 한국으로 온 외국인 청년. 그는 사랑을 위해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이 됐고, 또 사랑을 위해 대한민국 경찰관이 됐다. 한 여자와 가족,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해서 남과 조금 다른 삶을 살아온 한 남자. 도내 1호 귀화 외국인 경찰관인 김해중부경찰서 주지강(41) 경장을 만나 평범한 인도네시아 대학생에서 대한민국 경찰관이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한국에서 귀화 외국인이자 경찰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 사랑, 국경을 뛰어넘다

    1992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한 완구공장.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업한 대학생 주지강씨는 그곳에서 특별한 인연이 될 박미향씨를 처음 만났다. 낯선 나라 한국, 그리고 그곳에서 온 그녀.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파견 온 박씨는 그곳에서는 낯선 외국인이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에 온 지 갓 6개월을 넘겼기에 인도네시아어가 서툴렀다. 업무상 자주 마주쳐야 하는 두 사람. 주씨는 박씨에게 틈틈이 인도네시아어를 가르쳐주게 됐고, 비슷한 연배였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다른 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애감정이 생기지는 않았어요. 언어가 서툴러도 말이 잘 통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같이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생긴 것 같아요.”

    언어도 나라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마음 하나로 3년간 사랑을 이어갔다. 하지만 1995년 2월 그녀의 파견기간이 끝이 났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별은 아쉬웠지만 당장 미래를 약속하기도 어려웠다. 국적이 다른 데다 집안의 반대도 거셌기 때문이다.

    헤어진 후 2개월, 그리움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결국 주씨는 그녀를 따라 한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귀한 외동아들을 먼 타국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눈물이 눈에 밟혔다. 한국어라고는 그녀가 가르쳐 준 ‘누나’밖에 모르던 그에게 한국이란 낯선 도시가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에겐 그녀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고, 사랑은 용기가 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인도네시아 청년과 한국 처녀는 ‘국경을 초월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한 선택, ‘한국인’

    살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배우는 게 시급했다. 당장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전공했던 컴퓨터공학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그는 아내의 권유로 이화여대 한국어센터에 들어가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만 2년, 그동안 천사 같은 아이들도 태어났다. 그도 일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어 특기를 살려 산업연수생 송출회사의 한국사무소에 근무하게 된 주씨.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일을 독촉했고, 음식도, 정서도 적응하기가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견디고 이겨냈다.

    그리고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점, 그는 국적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정은 쉽지 않았다. 고향에는 부모님과 가족이 있었고,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역할을 택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고민도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한국에 있고 싶어 했고, 여러 가지 여건상 내가 한국인 남편과 아빠가 되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후회는 없을까. “솔직히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가끔씩 하긴 했지만 이제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난 한국인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 사람이 좋아 사람을 돕는 ‘경찰관’이 되다

    경찰관이라는 직업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송출회사에 근무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어를 전공했던 친구였기에 그와는 잘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경찰관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일을 그만뒀고, 1년 만에 시험에 합격했다. 인도네시아어 특채로 뽑힌 것이다.

    그렇게 경찰관이 된 친구는 주씨에게 수사할 때마다 통역을 수시로 부탁해 왔다.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관련 범죄가 급격하게 늘어가던 시기였다. 주씨는 친구의 부탁과 소개로 경찰서와 검찰청을 마치 ‘내 집 드나들 듯’ 오가며 통역일을 했다.

    그는 “원래 인도네시아에서 경찰은 부정부패가 많아 부정적인 이미지가 높아 안 좋은 직업으로 인식돼 있었는데 친구 일을 도와주면서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다”며 “또 당시 언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도움이 필요한 외국인들이 많은 걸 알게 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친구는 경찰관 특채 공모를 권유했고 그는 또 다른 인생을 준비했다.

    2008년 7월 25일, 드디어 그는 대한민국 경찰관이 됐다. 외국어(인도네시아어) 특채였다. 외국인들이 많은 김해중부경찰서가 그의 첫 발령지였다.

    제복을 입고 처음 출근하던 날, 그는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모두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찰관이 될 것”을 다짐했다.



    주지강 경장이 예배를 마친 인도네시아 외국인 노동자들과 상담을 하고 있다.
     

    #. 외사계 베테랑 수사관을 꿈꾸다

    김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주지강씨를 안다.

    외국인들이 근무하는 공장, 카페, 음식점들은 그의 주 근무지이기 때문이다. 고국어인 인도네시아어는 물론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기 때문에 중국어도 웬만큼 알아들어 외국인들과의 소통이 용이하다. 또 그들에게 ‘고향 친구’이자 ‘나와 비슷한 이방인’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그들이 주씨를 대하는 것은 여느 한국인 경찰관을 대할 때와는 다르다.

    그가 오고 나서 김해의 외국인 범죄자도 큰 폭으로 줄었다.

    “김해에 외국인 전과자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분석을 해보니깐 오토바이 무면허로 전과자가 된 사례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언어도 시간도 부족한 외국인이 오토바이 면허를 따려면 절차도 까다롭고, 발품도 많이 팔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교통계, 민원실과 협의해서 ‘주말 외국인 면허반’을 만들었어요. 주말에 수십 명의 외국인들을 모집해서 하루 안에 면허를 딸 수 있도록 코스를 만든 거죠. 그 이후로 400명이 면허를 땄고, 무면허 전과자도 많이 줄었죠.”

    이렇듯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늘 노력한다는 주씨.

    그의 꿈은 외국인 범죄를 전담하는 베테랑 수사관이다.

    주씨는 “외국인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들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게 우선”이라고 당부하며 “국내 특채자에 비해 서툰 부분이 아직 많지만, 외국인 출신인 저의 장점을 잘 살려서 수사를 하는 훌륭한 경찰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글= 조고운기자 lucky@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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