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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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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낙선자들에게-이선호 수석논설위원

  • 기사입력 : 2008-04-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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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 전 모 언론사 입사시험에 ‘春來不似春’이 논제로 출제된 적이 있었다. 작금의 시대상을 일찍이 간파했다고나 할까. 믿거나 말거나 왕소군(王昭君)의 ‘미인애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윤색되고 각색돼 중국 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왕소군은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지만, 못된 궁중 화공들이 그녀의 초상화를 고약한 추녀로 그려 임금에게 올렸다. 화공들이 뇌물을 안 주는 그녀를 밉게 보았던 것이다. 뒤늦게 임금이 이 사실을 알았으나 흉노족 군주에게 시집가야 하는 화번(和藩)공주로 이미 뽑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

    ‘春來不似春’은 1300여년 전 박명가인 왕소군이 읊은 시에 나온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오랑캐 땅에는 풀도 꽃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몽고사막의 먼지를 덮어 쓴 채 오들오들 떨었을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제나 이제나 잔머리 굴리고 교활한 화공 닮은 이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당한 사람들은 그녀의 심정을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왕소군이 생전에 느꼈던 ‘잔인한 4월’에 총선이 끝났다. 누군가는 ‘잔인한 4월’을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잔인한 4월’에도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1등만이 존재하는 선거판의 모습이다. 유권자들도 구슬과 자갈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난장에서 무던히도 애를 썼을 법하다. 보수가 분화되고 진보도 갈라져 감별하기가 쉽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15개 정당이 나열된 투표용지를 받아들곤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투표부역(投票賦役)’이란 말이 나왔을까 싶다.

    먼저 당선자들에게 축하와 함께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 국민들은 국회의원이 모든 일을 다할 수 있는 슈퍼맨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선거 때 내놓은 ‘설익은 공약’은 잘 다듬어야 하겠지만 ‘당선용 공약’은 꿰맞추려고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다. 부작용만 생긴다. 또 이래저래 주변의 도와준 사람들에게 ‘말빚’도 많을 것이다. 가급적 무시하는 것이 장수하는 길이다. 피 말리는 싸움을 벌였지만 낙선자들은 다시 정답게 봐야 하는 이웃이란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그들의 좋은 공약은 빌려 쓰고, 지역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덧붙여 인터넷에 떠도는 ‘옷걸이들의 대화’는 참고용이 될 듯하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히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유세 과정에서 넙죽 넙죽 큰절을 올렸던 자세를 임기 내내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1등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오히려 낙선자들에게 정이 간다. 이들 중엔 ‘공천 줄’을 잘못 서 고배를 마신 분도 있을 것이고 떨어질 줄 알면서도 평소의 소신을 알리려 기꺼이 출마한 분도 있을 것이다. 간발차로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고 지금쯤 신세타령을 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또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분도 있을 것이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하지만 4년은 그리 길지 않다. 따지고 보면 당선자들도 4년 후 잘릴지도 모를 ‘비정규직’이 아닌가.

    돌고 도는게 세상사다. 웃음만 있고 눈물이 없다면 인생살이 맛이 없다. 정녕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게 느끼는 이들이 어찌 그대들뿐이겠는가. 예부터 창랑수(滄浪水) 물 맑으면 갓끈을 빨고 물이 탁하면 발을 씻으라고 했다. 그때 그때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세상살이 지혜다. 스스로 시들어 버린다면 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요즘은 지구 온난화 탓에 겨울에서 초여름으로 바로 건너뛴다. 다시 뜻을 세워 4년 후를 기약해 보시라. 대중은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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