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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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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泣斬馬謖)]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다

  • 기사입력 : 2007-09-18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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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여러분들은 대부분 ‘삼국지(三國志 : 정식 명칭은 三國演義)’라는 중국의 역사소설을 읽어 봤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제96회는 ‘공명휘루참마속(孔明揮淚斬馬謖)’이라는 사실이 전개된다.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 : 그의 자가 孔明이다)이 눈물을 뿌리면서 촉한의 장수 마속(馬謖)의 목을 벤다는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촉한의 마씨(馬氏) 집안에 아들 오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뛰어났다. 그 가운데서 맏형인 마량(馬良)이 가장 뛰어났다. 그런데 그의 눈썹은 희었다. 이로 인해 후세에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켜 ‘백미(白眉 : 본래는 흰 눈썹이란 뜻)’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 아우인 마속(馬謖) 역시 걸출한 인물이었다. 특히 군사작전에 관해서 논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마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다르다. 제갈량은 그를 아주 대단한 인물로 보았지만, 유비(劉備)는 그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제갈량이 마속을 너무 편애하는 것 같아 유비가 숨을 거둘 무렵 이렇게 당부했다.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되오. 경(卿)은 잘 살펴보시오.” 그러나 제갈량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제갈량이 제1차 북벌(北伐)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서울 익주(益州 : 지금의 成都)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여 한중(漢中)을 점령하고 기산(祁山)으로 진격하여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조조는 지혜로운 장수 사마의(司馬懿)가 이끄는 군사 20만 명을 급파하여 기산 기슭에 부채꼴 모양으로 진을 치고 촉한의 군사와 대치하도록 했다. 이때 제갈량은 군량 수송로인 가정(街亭)을 수비하는 일이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누구를 뽑아서 지키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속이 자기가 나서서 지키겠다고 자원했다. 그러나  제갈량이 망설였다. 그러자 마속이 “만약 제가 패하게 되면, 저는 물론 저 가족까지 처형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재삼 간청(懇請)을 하기에, 그의 다짐을 받고 부득이 마속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한 수 위인 사마의는 마속의 작전을 꿰뚫어 보고는, 공격하지 않고 산 기슭에서 그대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마속의 군대는 군량과 식수가 떨어져 저절로 곤경(困境)에 처하게 되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산 정상을 버리고 밑으로 내려가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먼저 싸움을 걸었다가 마속의 군대는 참패(慘敗)를 당하고 말았다. 마속의 패전으로 제갈량의 북벌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게 되었고, 군대를 한중으로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량은 마속을 아끼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량은, “마속은 훌륭한 장수다. 그러나 개인적인 정 때문에 군율(軍律)을 어긴다면,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결과가 된다. 대의(大義)를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처형했다. 그러나 마속이 끌려갈 때 제갈량도 울었다고 한다. 이 역사적 사실은, 나라나 어떤 단체의 지도자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지, 자기와의 관계에 이끌려 법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교훈(敎訓)을 준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관이나 장관의 잘못이 드러나도 감싸려고만 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통치를 이런 식으로 해서야 질서가 잡힐 수가 없고,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진다 해도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저지른 죄과에 대해서는 아무리 측근이라고 해도 엄중(嚴重)하게 처벌해야만 나라의 질서가 서고, 특권층이 없어지게 된다.
    (*. 泣 : 울 읍. *. 斬 : 목벨 참. *. 馬 : 말 마. *. 謖 : 일어날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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