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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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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178) 진충보국(盡忠報國)

  • 기사입력 : 2007-02-27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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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한다

      조선 중기에 일화와 해학(諧謔)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이라는 문신(文臣)이 있었다. 오성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고. 한음(漢陰)은 이덕형(李德馨)이다. 이 두 분은 어릴 적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로서. 선조(宣祖) 때 같이 벼슬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치르면서 많은 공훈을 세웠고. 벼슬이 신하로서는 최고 지위인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이르렀고.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두 분의 일생이 비슷하다.

      한음은. 임진왜란 때는 체찰사(體察使)를 맡아 전쟁을 지휘하고. 명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는 등 분골쇄신(粉骨碎身)하였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복구사업에 쉴 틈이 없었다. 나라 일이 워낙 바빠 집에 돌아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대궐 문 밖에 조그만 집을 한 채 빌려 첩으로 하여금 거기서 거처하게 하여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날씨가 매우 더웠는데. 한음은 임금에게 장시간 여러 가지 일을 아뢰고 나자. 목이 되게 타고 가슴이 답답하였다. 대궐문 밖의 임시 거처로 급히 돌아와 입을 열어 말을 하기도 전에 손부터 내밀었다. 물을 달라는 표시였다.

      그런데 그 첩은 미리 제호탕을 준비하였다가 바쳤다. 제호탕이란. 대추 오매(烏梅) 백단향(白檀香) 등 한약재를 가루로 내어 꿀에 버무려 두었다가 찬물에 타서 먹는 우리 나라 전통의 청량음료이다. 한음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마시려고 하다가 마시지 않고 그 첩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는 이제부터 너를 버리겠으니. 너 갈 데로 가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길로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그 첩은 평소 매우 영리하였는데 한음의 총애를 한층 더 받기 위해서 미리 머리를 써서 더위를 식혀줄 제호탕을 준비하였는데. 그 일로 인하여 자신이 버림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다가 이튿날 한음과 마음이 가장 잘 통하는 백사(白沙)에게로 달려가 그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백사도 친구 한음이 정말 사랑하던 첩을 버렸다는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 뒤 한음을 만나자 백사는 “총애하던 여인을 아무 이유도 없이 버리는 것은 어째서인지?”라고 묻자. 한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여인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네. 얼마 전 내가 임금님께 일을 아뢰고 나왔을 때. 날씨가 매우 더워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말랐네. 그런데 내가 말도 하기 전에 그녀가 미리 제호탕을 준비했다가 주는 게 아닌가. 그 영리함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내가 그 그릇을 받아 들고서 그 얼굴을 보니. 온갖 애교가 내 마음을 끌어 더욱 아름답게 보이더군. 그래서 내가 ‘전쟁 뒤에 나라가 어지러워 아직 평정을 찾지도 못하여 안위(安危)를 걱정해야 할 시국인데. 나라 일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마음이 끌려 돌아보는 곳이 있게 되면 나라 일을 그르치고 말겠구나’라고 생각하여 은혜와 사랑을 끊고 나라 일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라네. 그녀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라네.”

      한음의 말을 듣고 백사는. “자네의 이번 일은 정말 늠름한 대장부다운 처사라네. 나 같은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일일세”라고 탄복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나라 일을 맡은 공직자로서 개인적인 애정관계를 끊은 한음의 처사는 공정하다고 하겠다. 모든 공직자들이 자기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충성스런 마음으로 나라 일에 전념한다면. 나라는 저절로 잘되어 갈 것이다.

      (*. 盡 : 다할. 진. *. 忠 : 충성. 충. *. 報 : 보답할. 보. *. 國 : 나라. 국)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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