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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관행의 `부조리' - 이선호 (수석논설위원)

  • 기사입력 : 2006-08-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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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베르 카뮈의 처녀작이자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출세작 ‘이방인’이 출판·번역되면서 등장한 ‘부조리’는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부조리’와는 전혀 뜻이 다르다.
    소설은 세상에 대한 자각도 없이 수동적인 권태감에 빠져 살던 평범한 주인공 뫼르소가 단순히 태양 빛 때문에 우발 살인을 한 후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인생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조리’란 용어는 카뮈가 말한 ‘인생에서 의의를 찾을 수 없고. 어느 곳이나 희망이 없다’는 데서 나아가 실존주의 철학이래 ‘혼란·암흑·죄악 등을 신의 힘과 기성의 도덕·윤리로써는 제어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서 오는 반항과 부정의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다소 난삽하지만 카뮈의 뜻이 어디에 있건. 한자풀이에 능숙한 이 땅에 들어와선 ‘조리에 닿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한묶음으로 부조리라 했고. 한편으론 부정·부패·비위 등이 부조리란 말로 뭉뚱그려 졌다. 이를 두고 작고한 한 언론인은 ‘부조리’의 부조리란 글을 내놓기도 했다.

    각설하고. 근자에 들어 ‘관행’이란 말이 젊잖은 분(?)들의 입에서 자주 나온다. 사전적 의미로야 ‘이전부터 하던 습관을 따라하는 것’이라든지 ‘주어진 상황에서 흔히 하던 대로 행동하는 것’ 등의 풀이로. 좋은 걸 따르는 관행은 권장할 만하고 관행과 유사한 아름다운 풍습이나 전통. 규범 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요즘 부쩍 오염되고 얼룩져 속을 뒤집어 놓는다. 광복절 특별사면을 하면서 불법대선자금과 당선축하금 연루자들이 과거 정치관행의 희생양이란다. 일부 법감정엔 어긋나지만 개인적 비리가 아니기 때문에 대승적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 운운 한다. 대선자금 문제는 임기중 마무리 짓고 새로운 미래로 나가자는 대통령의 뜻이라 뭐라나.

    그러면서 막판떨이 하듯 풀어주고 없었던 일로 했다. 차라리 개인적 비리라면 핀센트로 집어내듯 솎아내면 되지만 불법대선자금은 개인 비리보다 더 해악을 끼치는 구조적 악이 아닌가. 국민은 안중에 없는 ‘그들만의 관행’이다.

    이름도 ‘관행’인 전직 고법부장판사는 법조계를 확 뒤집어 놓았다. 대법원장이 대국민사과까지 했을 정도니 메가톤급이다. 구속영장에 기재된 행각을 보면 도덕 불감증의 극치를 보여준다. 휴가철엔 휴가비. 명절때는 떡값. 그외엔 용돈 명목으로 챙겼다. 자리를 옮길 땐 전별금도 받았다.

    십수년간 친교를 맺어 온 친구에게서 대가성 없이 받은 돈이라고 강변한들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덕택에 ‘관선변호’란 은어도 알게 됐다. 판사 사회에서 친인척의 사건을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우리 특유의 인정으로 담당판사에게 잘 봐 달라고 사정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번 사건에서 도가 지나쳐 일반에 알려졌지만 ‘그들만의 악습’인 셈이다.

    되뇌기조차 싫은 논문 편법 관행도 끝까지 버티다 물러난 교육부총리 사태로 다시 확인됐다. 흔한 중복게재 외에 기존 논문을 제목만 바꿔 새로 내놓는 자기표절. 하나의 조사를 여러 형태로 울궈먹는 논문쪼개기. 서로 이름을 올려주는 공저자 끼워넣기 등등 학계에선 극히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들이다. 하지만 관행이란 이름의 못된 행태가 어디 이들 세계 뿐이겠는가. 자기 돈이나 회사 돈으로 친다면 모를까 고급 정보를 캔다는 명분의 골프 취재관행. 학기가 바뀔 때마다 말썽인 촌지관행도 있다. 경제계의 노사관행. 거래관행은 어느 한쪽에선 주눅이 든다.

    어쨌든 법률보다 관행이 우리의 삶을 규제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관행은 ‘끼리 끼리’의 속성이 강하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식으로 그들만의 세계에선 용인되더라도 외부에 알려지면 비난의 대상이 된다.

    관행은 또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란 사고를 깔고 있다. 관행을 어떤 형태로 포장하고 치장하던 ‘오염된 관행’은 부조리다. 역대 정권에서 누차 강조해왔지만 ‘개혁’이 뭐 별건가. ‘오염된 관행’을 쓸어 버리는게 ‘개혁’이 아니겠는가.
    이선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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