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7일 (화)
전체메뉴

[금요칼럼] 2천원짜리 추리닝과 621조원

  • 기사입력 : 2005-11-04 00:00:00
  •   
  • 이선호 (수석논설위원)

        당신이 꿈을 꾸고 있을 때 나는 새벽 보초를 서야 했고, 당신이 팝콘을 먹으며 새로 나온 영화를 볼 때 나는 짱박아둔 건빵을 먹으며 수십번도 더 본 정신교육 비디오를 봐야만 했습니다. 당신이 하얀 눈속을 걸으며 즐거워할 때 나는 떨면서 쌓인 눈을 치워야 했습니다.' 한 유머게시판에 올라있는 군기 빠진(?) `군바리'의 넋두리다. 흔히들 군대가 많이 좋아지고 나아졌다고 하지만 `군인과 사람이 걸어간다'고 하듯이 제복의 틀속에 갖힌 군의 모습은 `사람'으로 바뀐 것 같지 않다. 공교롭게도 국방부가 `국방개혁 2020'을 야심차게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방부 인터넷 홈페이지가 네티즌들의 비난 글로 넘쳐난다. 위암말기인 줄도 모른 채 제대한 후 보름만에 판정을 받은 후 숨진 이른바 `노충국씨 사연'으로 인해 여론은 `역시'로 기울어진 것이다. 올들어 논산훈련소 인분사건과 중부전선 GP(최전방 감시초소)총기난사 사건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시점이라 서둘러 내놓은 듯한 `선진병영문화 비전'에 대해서도 `넷심'은 싸늘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말 청와대 기자들과의 산행에서 “세상이 바뀌면 생각이 다 바뀐다. 안 보다가 보니까 난리나 난 것처럼 생각하는데 10년 전만 해도 자나 깨나 있는 일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와 관련한 발언이지만 현재의 군이 처한 상황에 대입해도 꼭 들어맞는 말인 것 같다. 속병은 꾀병으로 알고 기합부터 주기 일쑤였던 군 의무대의 행태가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눈치도 없이(?) `오늘'까지 이어져 국방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자나 깨나 있던 일이지만 주특기인 `감추기와 덮기'가 통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와 버린 것이다. 윤광웅 국방장관은 총기난사사건 당시 취임 후 처음으로 GP를 방문한 후 “이렇게 열악한 줄 몰랐다”고 밝힌 적이 있다. 윤 장관은 이 말을 전해들은 군관계자들이 코웃음을 친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북과 마주한 GP의 막사가 그나마 타 부대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2020년을 목표로 추진중인 국방개혁안을 보면서 또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2천원 안팎의 `추리닝(트레이닝복)'이다. 15년간 자그마치 621조원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되는 국방개혁 예산에 `추리닝'을 바꿀 항목이 포함돼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첨단 무기를 다루고 있는 2천원짜리 `추리닝'을 입은 장병을 상상해 보라. 짚신 신고 벤츠 탄 꼴일 듯 싶다. 

     각설하고,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군의 고민을 모르는 바 아니다. 연간 27만명의 젊은이들을 새 식구로 맞아들이고 같은 수의 인원을 가족 품으로 되돌려 보내야 하는 거대 집단에서 바람 잘 날 없을 것이란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으니 몇가지만 적는다.

     군기는 군대의 질서이자 생명이지만 자기 주장과 자아 의식이 강한 신세대를 여하히 인격체로 다루느냐가 문제다. 먼저 타율에 의한 질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기존의 군관계법이나 복무규정상 일반 병사끼리는 계급·서열이 높더라도 명령권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주지시킨다면 우려되는 언어폭력이나 가혹행위 등을 줄일 수 있고 자율이 보장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달 말 발표한 `선진병영'비전은 종전 `수용개념'에서 `주거개념'으로 진일보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침상에서 일렬로 `칼잠'을 자던 것을 2인용 침대로 바꾸고 `내무반'을 `생활관'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병영내 문화가 쉽사리 바뀔 것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사랑과 애정이 담긴 `가족개념'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갔으면 한다. 한마디로 안심하고 갔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인격과 건강, 생명을 존중하는 병영이라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다할 리 없을 것이다. 폼나는 `추리닝'을 입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20여년간 직업군인으로 있는 분의 행복한(?) 넋두리가 생각난다. 자신에겐 무덤덤하던 아내가 자식이 입영한 후로는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챙기더란다. 이게 작금의 군을 보는 이 땅의 어머니들의 심정이란 사실을 거듭 헤아렸으면 한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