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6일 (월)
전체메뉴

[금요칼럼] '橘化爲枳(귤화위지)'의 교훈

  • 기사입력 : 2005-10-14 00:00:00
  •   
  • 서영훈(정치부 차장)

        한국적 민주주의.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다. 1972년 10월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된 이른바 ‘유신헌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민주주의의 토착화. 다른 말로 한국적 민주주의였다. 서구의 민주주의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고 역기능만 초래하고 있는 만큼.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어느 수준까지는 제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었고. 또 그 이념적 도구인 한국적 민주주의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퍼뜨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귤이 화이허(淮河). 즉 회수를 건너자 탱자가 된 것과 같다. 중국의 춘추시대. 제(齊)의 재상 안영이 초(楚)의 영왕(靈王)을 알현하고 있었다. 평소 제를 얕잡아 보고 있던 영왕이 안영을 놀려주다 오히려 역공을 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마침 초의 관리들에게 끌려가는 제나라의 절도범을 가리키며 “제나라 사람들은 도둑질을 잘하오”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말재간이 뛰어난 안영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귤이 회남(淮南:화이허 이남)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제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데. 초나라로 들어오면 도둑질을 합니다”라고 되받아쳤다.
    기후와 풍토가 바뀌면 식물이나 동물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장을 달리하게 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고 다를 것이 없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도 한국에 들어오면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그 변용이 민주주의의 원리인 자유와 기본권에 대한 침해라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원칙보다 변칙이 위세를 떨치면 그 원칙은 이미 원칙이 아니다.

        최근 정부가 재계와 노동계에 권고하고 있는 임금피크제도 탱자가 될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정부는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있고 또 기업의 인력구성도 고령화되어 가는 추세지만. 노후생활보장제도가 미흡하다보니 조기퇴직으로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임금피크제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는 기업에 대해 내년부터 재정지원을 한다는 계획도 이미 밝혀 놓았다.

        임금피크제는 일반적으로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하거나 정년 이후까지 고용을 연장하는 것을 전제로 노동자의 임금을 하향조정하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정의가 애매모호한 것은 ‘정년보장’이나 ‘정년후 고용연장’ 그 두 가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피크제에 관한 외국 사례로 자주 소개되는 일본 기업들의 경우, 고연령자고용안정법에 따라 정년 60세가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에 정년퇴직 이후의 고용연장 방안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예들 들어 63세까지 고용을 연장하고 싶으면. 57세를 피크로 임금을 삭감하는 식이다. 노동자로서는 임금을 일정 부분 양보하여 정년이후까지 고용을 보장받고, 기업은 실질적으로 고용인력을 늘리면서도 임금에 대한 추가부담은 지지 않는 ‘윈윈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지난 2003년부터 일부 기업에서 임금피크제가 실시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정년까지 고용을 전제하면서 그 몇년전부터 임금을 깎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지난 3월 ‘2005년 경영계 임금조정 기본방향’을 통해 ‘중·고령 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기업의 과도한 인건비 부담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임금을 생산성에 맞춰 조정할 수 있도록 50세 이상 근로자에게 임금피크제의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회원사에 권고하고 있다.

        정년연장도 없이 임금만 삭감하려 든다며 노동계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300인 이상 기업의 평균정년이 56.6세로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인 60세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의 임금피크제는 노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임금피크제가 바다를 건너오면 이렇게도 바뀌는 모양이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