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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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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다향(茶香)의 계절

  • 기사입력 : 2005-04-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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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점호(객원논설위원·경남문화연구원장)


    연록색 차순이 점차 신록을 더해 가는 4월의 끝자락이다. 하동 화개골과 전남 보성. 제주도 한라산 자락 등 차나무가 있는 골짜기마다 찻잎을 따고 차 만드는 일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특히 아침의 차밭은 파란 물안개가 피어나면서 싱그럽고 상쾌한 찻잎 향기가 은은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다원(茶園)에는 요즘 햇차를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로 부산하다. 차를 마시는 일은 입안을 상쾌하고 기분 좋게 하지만. 차밭 사이를 거닐며 깊고 그윽한 차 향기를 맡는 것 또한 운치 있고 즐거운 일이다.


    지금 남녘의 다원에는 차의 향기로 가득하다. 우리 조상들은 차 한잔을 놓고 눈으로 빛깔을. 코로 향을. 입으로는 맛을. 손으로는 잔의 감촉을. 귀로는 찻물 끓는 소리 등 오관(五官)에 스미는 다향(茶香)에서 생활의 멋과 수덕(修德)의 길을 열어왔다. 차를 가까이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맛을 나누고 정(情)을 나누는 우리 일상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차인(茶人)들은 햇차가 나는 4∼5월만 되면 남녘의 다원(茶園)으로 달려가 다향에 흠뻑 빠져드는 것을 풍류로 여겼다. 첫 물차는 색향미(色香味)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잔의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물을 끓이고. 찻잔을 데우고. 다관에 끓인 물을 붓고. 다관이 알맞게 데워지기를 기다려 물을 다 덜어내고. 다관에 찻잎을 넣고. 알맞게 식은 물을 부어 우려낸다. 차가 다 우러나 차의 고유한 빛이 나타나면 찻잔에 부어 차를 내어 마신다. 이러한 과정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에는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차를 우려낼 때 가지게 되는 느낌들은 동적(動的)이면서 정적(靜的)이고.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향기가 솟아난다. 동적인 것에서 묻어 나는 정적인 향기. 정적인 것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차의 향기. 이러한 것이 우리의 차문화다.


    우리 현대인들은 복잡한 사회생활로 인해 마음의 여유와 평정을 잃기 쉽다. 하지만 차 한잔을 놓고 명상에 잠겨보면 닫혔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고 생각이 깊게 트여진다. 그리고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다향(茶香)은 더할 수 없는 벗이 될 수 있다.

    혀끝에 한 방울만 올려놓아도 향과 맛이 곧바로 뇌에 퍼지며 정신을 말끔히 씻어주는 음료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마셨던 전통차다. 차를 어찌 약리효과만 따지며 마실 일이겠는가.


    차생활은 또한 인간의 품위를 높여 가는 생활이다. 그리고 우아하고 멋스러운 정취(情趣)다. 우리 조상들은 차를 가까이 하며 차의 담백한 맛과 청아한 분위기를 즐겼다. 찻물 끓는 소리를 소나무에서 바람이 스치듯. 전나무에 비가 내리듯 은은하고 소소한 감정을 느끼며 깊은 정서의 생활을 추구했다.

    다도(茶道)는 어디까지나 궁극의 목적이 일상생활의 기호(嗜好)에 있고 다만 물을 끓여서 간맞게 하여 마시면 되는 것이지만 그 기호는 건실한 인간생활의 중정(中正)의 대도(大道)를 실천할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 당나라의 고승 조주선사(趙州禪師)의 말씀 중에 ‘끽다거(喫茶去)’라는 화두가 있다. 조주선사는 도(道)를 물으러 오는 수행자들에게 차를 권해 ‘조주청다(趙州請茶)’라는 고사를 만들었다.

    끽다거(喫茶去)는 “차나 한 잔 드시고 가게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차 마시는 일처럼 일상 속에서도 깨침을 이루라는 말이다. 차(茶)와 선(禪)이 한 경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의 선현들도 ‘차의 깨끗한 정기를 마실 때 어찌 대도(大道)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랴’며 차의 정신을 중요시했다.


    우리 모두 바쁜 생활 속에서도 선현들의 풍류정신을 되살려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며 멋과 여유를 찾아보자. 풍류에는 반드시 차가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차를 즐겨 마신 큰 이유는 차가 건강에 이롭기도 하지만 차의 온건하고 신령(神靈)한 맛을 얻어 덕(德)을 기르는 차의 기본정신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우리 경남은 차의 본고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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