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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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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臨政요인 竹軒 李敎載선생

  • 기사입력 : 2002-05-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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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4일, 마산시 진전면 임곡리에 있는 한 묘소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거
    행됐다. 항일독립운동가요, 이 지역 유일의 臨政 要人이었던 竹軒 李敎載선
    생의 순국記績碑 제막식이 바로 이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金九선생의 비서를 지냈던 백범기념사업회 鮮于鎭선생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와 지역 주민 등 400여명이 참석해 竹軒선생의 행적을 기
    렸다고 한다. 조선 고종 24년인 1887년, 지금의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에서
    출생한 竹軒선생은 3.1운동 당시 경남.북을 오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
    다가 日警에게 체포돼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수형생활을 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 서울 서대문, 부산형무소 등에서 도합 16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 마디로 일생을 오직 조국독립운동에 바쳤던 것이다.

    庚戌國恥 그 해부터 24세의 젊은 나이로 항일운동에 뛰어든 선생은 상해
    臨政의 밀명을 받고 몰래 입국해 ‘칼톱회’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대를 조직
    해 애국지사들간의 연락을 맡았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등 큰 역할
    을 했다. 1931년 11월20일, 국내 광복활동 보고차 상해 臨政에 들렀을 때
    당시 내무장 趙琬九, 재무장 金九선생의 신임으로 그에게 현재의 도지사격
    인 ‘경상남북도 상주대표 임명장’이 수여됐다.

    日帝 密偵들의 동태를 살피다가 또다시 붙들려 부산 형무소에서 모진 고
    문을 받았으며 형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초죽음 상태에 이르자 감옥에서
    죽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던 선생을 日帝는 강제로 출옥시켰다. 竹軒선생은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온지 불과 열흘만인 1933년에 47세의 나이로 순국했
    던 것이다. 옥에서의 고문이 참으로 지독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
    는 대목이다.

    가족들은 고향 마을 ‘울비골’에 선생을 묻었다. 그런데 日帝는 잔혹하
    게도 무덤 주위를 철조망으로 둘러쳐 참배객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사
    실이 이러했으니 어찌 무덤이 제대로 정비될 수가 있었겠는가.

    1946년 9월, 竹軒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김구선생은 고인의 명복을 빌면
    서 가족들을 위로했으며 황량한 무덤을 보고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8년 후인 1954년에 마산일보(경남신문 前身) 김형윤사장이 주위의
    뜻있는 분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지금의 장소로 선생의 묘소를 이전해 비석
    을 세우는 등 말끔하게 단장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공적이 기록되지 않아
    마산시에서 1천300만원을 들여 학계의 고증을 거쳐 새롭게 공적비를 제작
    해 지난주 그 제막식을 가졌던 것이다. 선생은 1963년에 국가로부터 건국공
    로훈장을 추서받았다.

    竹軒선생이 臨政으로부터 수여받은 ‘상주대표 임명장’은 우여곡절 끝
    에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당시 日帝는 이것을 찾기 위해 수차례에 걸
    쳐서 집안 곳곳을 뒤졌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생의 부인이
    굴뚝 깊숙이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자칫 火氣라도 치밀었다면 영락없이 소
    실될 뻔했지만 하늘이 보살폈음인지 온전하게 보전될 수가 있어 참으로 다
    행이다. 수년전 한 사회단체가 이 임명장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힘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문화재로 확정되지 않은 것으
    로 알고 있다. 관련 당국은 이 문제를 더이상 끌지 말고 조속히 매듭지어
    주었으면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竹軒선생 애국기념관’ 건립을
    적극 추진해 나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 일은 후손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미룰 일이 아니다.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 다시말해 마산시가
    주체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먼저 斯界의 권위있는
    인사들 가운데 ‘독립운동가 竹軒 李敎載선생 애국기념관건립 추진위원
    회’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이 추진위를 중심으로하여 구체적
    인 사업을 시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기념관이라고하여 별도의 거대한 건물을 짓지 않더라도 우선 생가 또는
    생전 생활한 자택을 복원하여 이곳에다 선생의 체취가 묻은 일체의 유품·
    유물을 전시한다면 이것 또한 의미있는 기념관이 될 수가 있다. 그리고 竹
    軒선생의 독립운동행적뿐만 아니라 출생에서부터 순국하기까지의 삶을 소상
    하게 기록한 일대기를 출판하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선생을 기
    억하는 이들의 증언과 후손들의 회고록도 포함된다.

     우리 자신이 교훈으로 삼고 후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유
    산은 바로 우국지사들의 애국심일 것이며 또한 그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짙
    게 배여 있는 유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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