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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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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생활문화가 없는 나라

  • 기사입력 : 2000-09-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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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폴란드를 방문하였을 적에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대우자동차 공장
    을 견학한 일이 있었다. 국영자동차 공장을 대우그룹에서 인수하여 경영하
    고 있는 폴란드의 최대 자동차 공장으로서 종업원만도 2만여명에 이르고 있
    었다. 한국인 중견 간부들과 얘기를 나누는 중에 『폴란드에서 가장 애로
    사항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한국인 간부들은 한결같이 「문화적 격차」
    임을 들고 『우리 문화를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는게 없다』고 얼굴을 붉혔
    다.

    뜻밖의 말에 당황한 필자는 『유럽보다 20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
    한 나라이며, 고려 청자, 조선 백자는 도자기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
    로 외국에서도 높게 평가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폴란드에서 근무하는 중견 사원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민족에겐 생활문
    화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고 토로했다. 노조기념일이나 국경일
    에 파티장에서 폴란드 근로자들이 한국 간부 사원에게 춤추기를 청해 올 때
    가 가장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정식 사교춤을 출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춤 문화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열등감을 맛본다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
    라 음악, 미술, 문학, 종교 등 어느 분야에도 자신있게 얘기할 만한 수준
    이 안된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었다.

    폴란드는 비록 경제가 좋지 않아 국영자동차 공장을 대우그룹에 팔지 않으
    면 안될 처지였지만, 문화수준만큼은 우리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인식
    하게 됐다고 했다. 쇼팽을 배출한 음악의 나라이면서, 96년 폴란드 여류시
    인 쉼 브린스캬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배출만
    도 6명에 이르고, 현 바오로 교황도 폴란드 출신이다. 한국 근로자들은 문
    화에 대한 대화를 꺼릴 수밖에 없고, 일과 돈밖에 모르는 비문화민족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괴롭다고 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문화민족」이라 내세워 오던 터에 참담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88서울올림픽 때의 일이다. 올림
    픽은 민족문화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점에서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심혈을 쏟았다. 동양문화라하면 중국과 일본 문화의 특성을 얘기
    하면서도 한국 문화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현상을 일깨워줄 수 있는 기회
    가 서울 올림픽이었다. 많은 관광객들을 가정으로 유치하여 민박하도록 한
    프로그램은 한국의 생활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고유의 생활문화를 갖고 있
    지 않았다. 전통 민속춤을 보여주지 못했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가정에서 보여주지 못하였다. 전통 춤과 음악은 미개국의 어느 마을이나 가
    정에서도 즐길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생활문화의 모습이다. 우리는 어느
    새 서구 문화의 분별없는 수입으로 문화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민
    족 고유의 춤과 음악을 잃어버리고, 서양의 문화 리듬에 놀아나는 통에 민
    족의 생활문화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의 경우는 뿌리 깊은 생활문화로 5道가 있다. 茶道, 書道, 花道, 柔
    道, 劍道가 그것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통치문화의 형태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국민의 심신단련과 질서의식을 고취시켜 민족 공감대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는 2002년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되는 월드컵대회는 비단 축구만이 아니
    라 한·일간의 문화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게 문화계 인사들의 추측이다.
    문화도 극심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수한 문화가 열등한 문화를 흡수 동
    화시키기 때문에 생활 속에 뿌리내린 생활문화를 갖지 않고는 민족문화를
    지켜낼 수가 없다. 우리 고유 문화가 생활 속에 발 붙이지 못한다면, 민족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것이며 문화적 긍지을 에너지원으로 하여 새롭고 창
    의적인 민족문화를 어떻게 창달할 수 있겠는가.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 말하면서도, 진작 우리 생활문화를 찾고 삶
    속에 뿌리 내리는 일에는 관심조차 갖는 사람이 적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국민 각자가 고유 악기 1종씩을 연주할 수 있고, 우리 춤을
    출 수 있는 자질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육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사회환경을 조성하며 국민의식부터가 달라져야 한다. 우리 문화가 없인 세
    계와 어떻게 경쟁하며 문화시대로 나갈 수 있겠는가. 우리 생활문화에 대
    한 대각성과 인식전환이 있어야 한다. 정목일 (기획출판국장겸 논설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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