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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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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낭만 농부 - 김시탁(시인)

  • 기사입력 : 2024-05-08 2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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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번기에 접어드니 종묘상이 붐빈다. 귀농 10년 차에 접어드는 필자도 모종 구입을 위해 종묘상에 들렀다. 종묘상에는 다양한 모종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고추 모종은 탄저병과 역병에 강한 복합내병성 고추, 꽈리고추, 청양고추, 모닝 고추, 비타민 고추, 미인 고추, 가지 고추는 해마다 필자가 심는 품종들이다. 오이는 가시오이와 백다다기, 토마토는 완숙과 빨강 대추 방울토마토, 수박은 박에 접붙인 모종과 복수박, 호박은 애호박과 맷돌 호박이면 된다. 가지와 고구마도 필요한데 고구마는 밤고구마와 꿀고구마만 심다가 올해부터 자색고구마를 추가했다. 그렇게 심고 나서 나중에 들깨 참깨 모종이 나오는데 그걸 마저 심으면 올 농사 준비는 다 된 셈이다.

    땅콩과 옥수수는 직접 파종한다. 누가 보면 무슨 거창한 농사라도 짓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구색만 갖추었을 뿐 실속은 없다.

    유기농이랍시고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농작물 상태가 부실하다.

    배추는 이파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렸고 토양 살충제 없이 심은 양파나 마늘도 땅벌레 간식거리로 전락해 작황이 좋지 않다. 그나마 방제 없이 배양이 가능한 게 상추 종류인데 그것마저 밤중에 고라니가 내려와 뜯어먹고 고구마는 멧돼지가 아작 낸다. 땅콩 들깨 참깨는 고소한 새들의 모이다. 진딧물이나 벌레 방제를 위해 식초나 설탕물, 주방세제 또는 목초액 등으로 천연제거제를 만들어 사용하지만 살충제만큼은 못하다. 잡초는 빙초산 치고 죽지 않으면 펄펄 끓인 물을 갖다 붓든가 부탄가스에 불붙여 화형시킨다. 그렇게 벌레와 새들이 먼저 시식한 경작물은 빈약하고 볼품없다.

    하지만 농작물을 풍성하게 잘 키워서 납품할 것도 아니고 제 입에 넣는 것이니 수확이 부실한 대로 벌레도 짐승도 사람도 함께 먹으며 공생한다. 나름 유기농이니 몸에는 좋을 거라 믿고 먹으면 정신건강에도 나쁠 게 없다. 다만 벌레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나무젓가락으로 일일이 잡아 생수병에 넣고 마개를 닫는다. 아내는 유튜브에서 배웠다며 유충 잡는 막걸리 트랩을 만들어 설치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그나마 거기 들어가 죽어주는 나방이나 벌레는 드론으로 약 칠 때 옆에서 구경하다가 약물 좀 먹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 것이다.

    콩 심으며 아내 모르게 코스모스 씨도 듬성듬성 뿌린다. 나중에 코스모스 싹이 나면 우리 농장까지 씨가 날아왔다며 기왕이면 꽃도 피우자고 말한다. 아내는 몇 개만 남겨두고 뽑으라지만 말뿐이다. 더덕 심는 둑에 수국도 같이 심어 농작물 가꾸며 꽃향기에도 심취한다. 농사지어 배부르고 꽃씨 뿌려 영혼이 부르니 낭만 농부 아닌가. 땀 흘려가며 김맬 때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온몸을 흔들며 ‘쉬었다 해요’ 하고 붉은 립스틱 코스모스의 입술이 향기를 묻혀 속삭이면 호미 내던지고 쉬지 않아도 피로를 잊는다. 농부의 삽날을 깊숙이 받아주는 좋은 땅심을 베고 누워 서산 하늘을 바라보고 쉬노라면 훅훅 뿜어오는 수국 향기는 흙냄새와 뒤엉겨 정신이 다 혼미해진다. 아내는 농장 빙 둘러 울타리라도 쳐서 유해 동물들 피해라도 좀 막아볼 궁리를 하라지만 그것들도 먹고살려고 그런다 싶어서 그냥 내버려 둔다. 그러다 보니 채소밭은 고라니 구내식당이고 고구마밭은 멧돼지 제식 훈련장이다. 그래서 당초 모종을 구입할 때 그걸 감안하여 넉넉하게 구입한다. 넓은 농장을 묵혀놓으면 잡초만 무성해져 관리도 어려울 테니 가급적 파종량을 늘리고 모종을 많이 심어 빈터를 없앤다. 수확량을 늘리면 그만큼 공생해도 양식 모자랄 염려는 없기 때문이다. 방제하지 않아 메추리알만 한 매실을 딸 때면 아내는 또 입이 튀어나오고 봄 도다리 눈으로 쳐다보겠지만 전지로 잘라낸 매화꽃을 식탁에 꽂을 때 짓던 그 소녀같이 화사한 미소만으로도 낭만 농부는 행복하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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