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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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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꽃이 피는 이유- 안순자(수필가)

  • 기사입력 : 2024-04-18 19: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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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물이 소생하느라 봄기운이 웅성거리며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하마 기온이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한다. 요즘같이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꽃은 제 몫을 다하느라 나름 분주하다. 봄볕에 사방 천지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개나리도 한창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풀밭에 다사롭게 속삭이듯 지천으로 피기 시작하는 야생화들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집 근처 체육공원에서 트랙을 따라 걷고 있는 나를 보자마자 그가 다가와 불쑥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꽃이 피면 이 공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며, 사람에게 못 하는 말을 꽃에다 대고 얘기를 쏟아놓는단다. 실컷 하소연하고 나면 눈물이 나면서 가슴이 후련해지니 어서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말을 무심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어냈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상대만 있으면 되지 그 어떤 응답을 바라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돌직구에 유연하지 못한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단순하게 훅 치고 들어오는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신선해 보였다. 그의 입에서 저런 표현이 나오다니.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몸으로 체득한 시 몇 소절쯤 수월하게 풀어낼 수도 있겠다 싶다.

    예전에 그와 이웃으로 살면서 가끔 마주쳐도 눈인사만 서로 나누던 사이였다. 그래도 데면데면 지낸 몇 년의 시간이 그냥 흐른 것은 아니었나 보다. 비슷한 연배여서인지 알게 모르게 이심전심 통한 것이 있었을까. 그날 우연히 공원에서 만나 두서없는 한 시간여의 소통이 이웃으로 지낸 지난 몇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오래된 지기라도 된 듯했다.

    아마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헤어지고 나면 나와는 언제 또 볼지 모르니 아무 부담 없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을까. 가까운 사이라도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에 자신이나 가족의 치부를 꽁꽁 숨기고 있는 것보다는 진솔하고 순수해 보였다.

    가끔 흉금을 털어놓고 위안받고 싶은 친구 한 사람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말했나 돌아서서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 누가 뭐라고 내 흉을 봐도 끝까지 내 역성을 들어 줄 완전 내 편인 사람 말이다. 그런 친구를 곁에 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가슴 깊이 묻어둔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을 상대는 내가 아니라 꽃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실망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이 아닌 사물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속풀이의 대상으로 꽃을 선택한 것은 그나마 그 나름의 숨통이고 안전한 해법이었을 것이다.

    하얗게 타들어간 속내를 꽃을 향해 주저리주저리 뱉어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쩌면 수런거리며 핀 저 많은 꽃 속에 그의 넋두리가 소복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신의 뜻으로 이 꽃들이 피어났다면 그가 쏟아낸 하소연은 신을 향한 고해성사가 아니었을까.

    안순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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