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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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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을 빛낸 경남의 거장들] (6) 이상갑

풍요로운 고향 풍경서 삶의 본질 담아내다
경남신문·경남도립미술관 공동기획

  • 기사입력 : 2024-03-25 20: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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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 중성동 출생, 일본으로 유학
    마산 첫 미술단체 흑마회 창립 멤버
    일상적 시선으로 서정적 화풍 구현
    지역미술계 발전 후배 교육에 힘써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중 제작연대가 가장 오래된 서양화는 어떤 작품일까? 바로 이상갑의 ‘복숭아’(1936)이다. 일본 동경부국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상갑이 16세에 그린 작품이다. 리넨 위에 펼쳐낸 다섯 알의 복숭아를 담은 정물화로, 간단한 소품임에도 탄탄한 구도와 형태, 색채 표현이 돋보인다. 일찍부터 발현되었던 작가의 기량이 물씬 드러난다. 이 작품은 2007년 수집 당시 화면의 네 모서리 훼손이 심하고 물감층 균열, 박락이 진행되어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작품 복원사업을 통해 1년여에 걸친 복원·보존처리를 마친 상태다.

    복숭아, 1936년, 종이에 유채, 31.8×40.9㎝,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복숭아, 1936년, 종이에 유채, 31.8×40.9㎝,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이상갑(1920~1996)은 해방 후 한국의 서양화단을 이끌었던 1세대 화가이다. 2020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경남도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아마 이상갑을 기억하는 이들 중에는 그에게서 미술교습을 받은 제자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일평생 붓을 놓지 않고 지역 미술 발전과 교육에 힘썼던 이상갑의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1920년 경남 마산시 중성동에서 태어난 이상갑은 안의(현 함양·거창을 포함하는 지역) 현감을 지낸 조부의 회갑연에 출생하여 ‘상갑(相甲)’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서울중동중학교를 거쳐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동경부국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동경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양화과에 입학하였다. 화가를 환쟁이로 치부했던 시대상을 떠올려보면 물심양면으로 아들의 유학을 도왔던 그의 부모는 남다른 교육열이 있었을 것 같다.

    추산공원이 보이는 마산항, 1965년, 캔버스에 유채, 91×116.7㎝,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추산공원이 보이는 마산항, 1965년, 캔버스에 유채, 91×116.7㎝,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이상갑은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를 시작으로 일본의 양대 미술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1940)과 ‘독립전(獨立展)’(1941)에 연이어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1943년에는 동경유학 중인 미술학도들이 결성하여 자주적인 민족운동을 펼쳤던 ‘백우회(白牛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서울로 귀국한 후 제주에서 잠시 피난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이상갑은 생의 대부분을 거창과 마산에서 보냈다. 한국의 서양화는 일제강점기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경남 역시 해방 후 귀국한 박생광, 김용주, 김종영, 임호, 이림, 이준, 이상갑, 문신, 이수홍 등이 주축이 되어 미술계에 활기를 넣고 새로운 유형의 서양화가 알려졌다. 1954년 거창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상갑은 마산 최초의 미술단체 ‘흑마회(黑馬會)’의 창립 멤버로 ‘제1회 흑마회전’(1955)에 출품하였다. 그는 총 2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고향생각, 1995년, 캔버스에 유채, 31.8×40.9㎝, 개인 소장.
    고향생각, 1995년, 캔버스에 유채, 31.8×40.9㎝, 개인 소장.

    이상갑의 작품을 살펴보면 인상주의 화풍의 구상화가 주를 이룬다. 대상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들로 안정적 구도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채를 사용해 평화롭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젊은 시기에는 ‘수전노(守錢奴)’(1953)처럼 추상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진실한 삶의 본질을 가식 없이 담아내 많은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이내 구상으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특히 일상적 시선과 마산 정경이 눈에 띈다. ‘추산공원이 보이는 마산항’(1965), ‘마산 동중에서 무학산의 풍경’(1960년대)은 현재는 아파트로 둘러싸여 볼 수 없는 무학산 언덕에서 바라본 옛 마산항과 무학산의 정경을 밀도감 있게 보여준다. 알록달록한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 너머로 잔잔한 내항의 맑은 바다가 펼쳐지고 무학산의 싱그러운 청록은 우리를 잠시나마 그 시절, 그 순간의 풋풋함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삶(어시장)’(1980), ‘해녀들’(1984)은 시장이나 선창가 등 생활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과 갯바위 해녀들의 무리를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상인들의 표정에는 삶의 고단함보다는 성실하고 건실한 노동의 기쁨과 강인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마산 동중에서 무학산의 풍경, 1960년대, 캔버스에 유채, 53×72.7㎝, 개인 소장.
    마산 동중에서 무학산의 풍경, 1960년대, 캔버스에 유채, 53×72.7㎝, 개인 소장.
    삶(어시장), 1980년, 화판에 유채, 143×110㎝,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삶(어시장), 1980년, 화판에 유채, 143×110㎝,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해녀들, 1984년, 캔버스에 유채, 53×30.3㎝,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해녀들, 1984년, 캔버스에 유채, 53×30.3㎝,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내 고향은 언제나 좋은 느낌입니다. 퍼득거리는 생선을 앞에 놓고 고함을 지르는 선창가 아주머니들의 모습, 평화로운 고향 산하 모두가 제 작품의 모태가 됩니다.” (작가 인터뷰, 1993)

    이상갑은 미술계의 급격한 변화를 좇기보다는 순수하게 자신만의 주관과 감각이 이끄는 대로 작업을 고수했다. 1980년대는 전국의 산하를 사생하며 자연 그 자체의 신비와 경이로움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말년에 와서는 평화로운 대자연 속에서 노니는 아이들과 소, 한복 입은 동네 여인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는 고향의 산과 들 바다, 해변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보냈던 유년기의 정서적 풍요로움과 무관하지 않다. 그로부터 배태된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그의 작품 전반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이상갑 작품의 기저에는 묵직하고 올곧은 작가의 성품에서 묻어나는 참되고 소박한 삶에 대한 예찬과 향토애가 짙게 서려 있다.

    박현희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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