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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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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ON- 이달균의 경남 영화 촬영지 돋보기] (2) ‘버닝’ 거창 상천저수지

현실인 듯 몽환인 듯… 미스터리 늪에 빠지다
지역작가 5인5색 힐링보따리

  • 기사입력 : 2024-01-11 21: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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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개 진원지’ 거창 상천저수지
    맑은 겨울 물빛에 반짝이는 윤슬
    물살 가르는 바람의 날갯짓도 요란



    2018년 5월 개봉한 영화 ‘버닝(burning)’을 다시 본다. 극장을 나올 때 잡히지 않는 회색 안개 같은 것이 시야를 가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늘 그 영화를 생각하면 현실인 듯 몽환인 듯 그날의 흐릿한 풍경이 떠오르는데 오늘은 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생겼다.

    영화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반딧불이’에 실린 단편 ‘헛간을 태우다’이다. 난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가끔 원작을 찾아 읽는 경우가 있다. 원작의 어떤 부분과 다르고 어떻게 첨가되었는지를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전 책이 필요하다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어쩌면 그는 이 책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된 책이라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도 없네요.” 그래서 잊고 있었다. 이틀이 지났을까. “그 단편집 찾았어요.” 어떻게 찾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원고를 쓰자고 마음먹은 날부터 난 이미 젖어버린 습자지처럼 그 영화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버닝’ 촬영지인 거창 상천저수지에 햇빛에 비친 물살이 반짝이고 있다./이달균 시인/
    영화 ‘버닝’ 촬영지인 거창 상천저수지에 햇빛에 비친 물살이 반짝이고 있다./이달균 시인/

    이 영화는 우리 시대를 사는 빛깔이 다른 세 청춘에 관한 이야기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행간에 숨겨 둔 의미는 다의적이고 복합적이다. 사람마다 다른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영화라고나 할까. 우리가 익숙하게 본 정형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난해하고 새롭고 매력적이다. 제목은 불타는 그 무엇에 관한 이야기지만 실은 타오르거나 빛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안개에 가려진 노을빛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그래도 끝까지 집중하게 하는, 발목에서 목덜미까지 차오르는 미묘한 미스터리의 체험을 하게 된다.

    평론가의 평가와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릴 때가 있다. 이 영화가 대표적이다. 흥행에 비해 수상실적이 화려한데, 제55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하여 국내외에서 17개의 상을 받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71회 칸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53회 전미비평가협회상 등이 그것이다. 그만큼 평단의 평가는 좋았으나 관객에겐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설명하려면 인물에 대한 유형을 전달하는 것이 편리하겠다. 세 사람의 주인공 가운데 종수(유아인)부터 얘기해보자. 그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소설가 지망생이며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쓴 글은 문학적 묘사라고는 전혀 없는 아버지에 대한 탄원서 한 장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매장 광고를 위해 춤추는 초등학교 동기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연인인 듯 친구인 듯 하루에 한 번 햇살이 들어오는 해미의 집을 드나들면서 그녀와 관련한 상황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게 된다. 종수는 언제쯤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영화 맨 마지막에 해미의 집에서 소설을 쓰는 듯한 장면을 창 너머로 볼 수 있는데 어쩌면 이 영화 자체가 그의 소설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버닝’ 스틸컷.
    영화 ‘버닝’ 스틸컷.

    해미는 가족과는 연락하지 않은 채 혼자 살며 빚이 꽤 있는 여성이다. 그럼에도 열심히 돈을 벌거나 신분 상승을 추구하지 않는, 결핍으로 뒤엉킨 정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에 머물러 있다. 팬터마임을 배우고,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고, 돌아와 삶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는 그레이트 헝거 부족의 춤을 추곤 하지만 어딘지 늘 겉도는 인상이다. 그 쳇바퀴는 자신에겐 익숙하나 관객에겐 연민과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종수를 만나면서도 종수의 어깨 너머를 보는 듯한 눈빛은 비현실적이고 허망해 보이기까지 하다. 백치미의 순수하고 단순한, 욕정의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매력적인 여자다.

    벤(스티븐 연)은 이 둘에 비해 훨씬 미스터리한 청년이다. 포르쉐를 몰고 강남의 빌라에 살고 있으며 부잣집 아들 특유의 여유로움과 미소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미소는 늘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어떤 연유로 부자가 되었는지, 무엇을 추구하며 직업이 뭔지 알 수 없다. 가끔 벽에 걸어둔 풍경화 같은 사람들과 작은 파티를 열기도 한다. 이 영화의 중요한 대사는 벤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그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걸 맘대로 만들 수 있고, 더 좋은 건 그걸 먹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제물을 만들고 내가 그걸 먹는 거야”라고. 이는 요리에 대한 철학치곤 너무 야릇하고 의미심장하다. 해미의 춤을 보면서 그로테스크한 눈빛으로 하품을 한다. 취미는 엉뚱하게도 비닐하우스 태우기란다. 벤으로 분한 스티븐 연은 2021년 작 ‘미나리’를 통해 전 세계에 얼굴을 알린 한국계 미국인이다.

    영화 ‘버닝’ 포스터와 스틸컷.
    영화 ‘버닝’ 포스터와 스틸컷.

    ◇인생은 미스터리의 저수지를 헤엄치다 가는 것인가

    해미는 종수에게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어릴 적 그 우물에 빠졌는데 종수가 건져주었다고 한다. 종수는 기억이 나지 않아 해미의 언니와 엄마에게 물었으나 그녀들은 우물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하고, 마을 이장도 우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 만난 엄마는 물이 말라버린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우물의 존재는 종수를 혼돈에 빠지게 한다. 자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있었다는 사람과 없었다는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혼돈은 종수만의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전이된다.

    해미가 여행을 떠나면서 부탁한 고양이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먹이는 계속 없어진다. 집주인은 고양이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먹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 후반부에 오면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때 종수는 우연히 벤의 집 서랍에서 해미에게 선물한 분홍색 시계를 본다. 사라지고 없는 사람의 시계가 왜 벤의 서랍에 있을까. 물론 흔한 시계였으니 꼭 그녀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시계와 함께 싸구려 액세서리들이 여럿 있으니 꼭 그녀의 것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종수의 집 근처에서 벤이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는 사실이었을까. 며칠을 돌아다녀 봐도 태운 비닐하우스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의문은 계속된다.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는 감쪽같이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벤의 어떤 무서운 행위의 은유일까? 아니면 정말 해미는 저 홀로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일까. 의문은 자물쇠로 닫혀 있고 관객은 그 닫힌 문 앞에서 서성인다. 영화는 굳이 열쇠를 찾지 말고 이런 서성임을 즐겨보라며 마침표를 찍는다.

    이 영화에선 옷을 벗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해미는 대마초를 피우고 난 후, 석양을 향해 윗옷을 훌훌 벗고 서쪽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춤춘다. 허공에 흔들리는 팔은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무의식의 욕망처럼 허무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장면과 대칭을 이루듯 말미에서 종수는 느닷없이 벤을 칼로 찌르고 추운 들판에서 속옷마저 벗어 던진다. 옷은 벤의 차와 함께 불태워진다. 종수의 남루한 옷은 낡은 비닐하우스처럼 태워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무엇이었을까. 불태운다는 것은 폐허로 가는 지름길이다.

    무엇인가 태워져 없어진 자리에 남은 재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결국, 폐허는 새로운 무엇을 태어나게 하는 마지막 욕구처럼 읽힌다. 벤은 그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했지만 진정 그 무엇을 태워야 할 사람은 종수 자신이 아니었을까. 뭔지 모를 이유로 가려져 있던 장막이 낡은 비닐하우스와 동급인 자신을 감싼 남루한 이상이었다면 종수는 그것을 불태워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소설가에게 소설은 인생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현실과 마주하면서 소설가로 거듭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불태움이 아니었을까.

    영화 ‘버닝’ 촬영지인 거창 상천저수지./이달균 시인/
    영화 ‘버닝’ 촬영지인 거창 상천저수지./이달균 시인/
    영화 ‘버닝’ 촬영지인 거창 상천저수지./이달균 시인/
    영화 ‘버닝’ 촬영지인 거창 상천저수지./이달균 시인/

    ◇미스터리, 상상력의 공유

    누군가 내게 가장 문학적인 한국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꼽고 싶다. 소설적이라기보다 매우 시(詩)적인 영화란 생각이 든다. 소설을 극화한 것을 두고 시적이라 느낀 것은 아이러니다. 그런 만큼 여백을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아니 여백이라기보다 상상력의 공유라고 하는 말이 맞겠다. 그 상상력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장르는 무얼까? 굳이 말하자면 미스터리 영화에 가깝다. 그렇다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살인’ 유의 미스터리 스릴러와는 빛깔과 의도부터가 전혀 다르다. 인물과 인물이 자아내는 흥미진진한 사건의 연속 같은 것이 미스터리물의 전형이라면 이 영화는 그저 조용히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줄 뿐, 너무 평온하다.

    미스터리의 소재인 해미의 집 근처에 있었다는 우물, 해미가 키운다는 고양이, 종수가 선물한 시계, 벤이 취미 삼아 불태운다는 낡은 비닐하우스 등은 상상력의 공유를 위해 배치한 오브제다. 이들 소재는 한 번도 선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흡사 안개 속에서 존재하는, 그래서 안개가 걷히고 나면 사라지는, 그런 모호성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오래 각인된 어떤 대상을 애써 허물거나 행간에 감춰두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영화의 전개방식이 꼭 시와 닮았다. 우물과 벤이 불태웠다는 비닐하우스는 실재하였는가. 아니면 은유인가, 수수께끼인가. 감독은 그런 질문을 던짐으로써 관객과 숙제를 공유한다. 내일을 모르는 우리네 인생도 미스터리의 저수지를 헤엄치다 가는 것이니까.

    오늘 내가 찾아온 이 상천저수지(거창군 위천면)는 그런 안개의 진원지다. 벤은 왜 이곳 저수지 둑까지 포르쉐를 몰고 와 오래 물을 바라보았는가. 종수는 왜 여기까지 쫓아와 저수지를 바라보고 선 벤을 바라보았을까?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시방 겨울 저수지의 물빛은 맑다. 이쯤에서 객관적인 대상인 벤은 종수에게 주관적으로 다가왔을까. 상천저수지의 그 맑은 물빛이 어떤 확신을 위한 매개물이 되었을까.

    거창에는 현성산, 우두산, 금원산, 기백산 등 등산코스가 여럿이다. 등산을 위해 찾았을 때의 모습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침식된 계곡 곳곳에 화강암이 희끗희끗 드러나 있고, 바위와 언덕으로 이뤄진 호수가 장관을 이룬다. 조금씩 햇살이 퍼지는 시각이라 자욱했던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적은 없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진으로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드론으로 찍으면 훨씬 나은 사진을 얻을 것 같다. 그래도 영화 속 겨울 저수지를 담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해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벤이 가끔 욕망이 솟구칠 때마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듯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짓을 했을까. 원작에는 태우는 대상이 헛간인데 영화보다는 조금 직접적이다. “세상에는 그런 헛간이 얼마든지 있다는 겁니다. 제게는 제 헛간, 당신에게는 당신 헛간이 있어요.” 그렇다면 헛간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 즉 인근에 있는 헛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헛간이나 비닐하우스는 있어도 그뿐 없어도 그뿐인 어떤 존재를 상징한다. 시에 있어 모호성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죽여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대상으로 허술한 비닐하우스를 소재로 택한 것일까. 그런 모호함이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한해 농사가 끝나면 비닐은 후줄근해진다. 어쩌다 이 비닐이 태워졌다고 해도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철골 뼈대는 남아 있으니까. 그러니 그런 존재 하나가 없어졌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연쇄살인마들은 식구의 족보에서 지워진 사람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영화 ‘추격자’의 모티브를 제공한 소시오패스 유영철도 업소의 여인을 대상으로 했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문인은 더러 있다. 시인으로는 유하, 백학기, 손영호 등이 있고, 소설가로서는 2022년에 개봉한 영화 ‘뜨거운 피’의 천명관이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문인으로서 가장 성공한 감독으로 이창동을 꼽지 않을 수 없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전리’가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1992년에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분단, 도시화, 산업화 등이 소설의 출발점이었는데, 그런 관심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등 초기 영화를 통해 선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늘 질문한다. 진화라는 표현은 그렇지만 그 말 말고 다른 말로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이창동의 질문은 계속되고 더 심화된다. 컴퓨터 리셋하듯 “나 돌아갈래”를 외치며 망가진 인생과 작별하는 사내를 통해 아픈 시대를 그려낸 ‘박하사탕’, 시(詩)가 죽어가는 시대에 왜 시를 읽느냐고 묻고 싶어지는 영화 ‘시’, 내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용서했대”라고 울부짖는 엄마의 절규를 그려낸 ‘밀양’ 등 작품마다 굵직하고 둔탁한 질문을 던져왔다.

    2024년 1월, 영화 버닝의 한 장면을 찍은 거창 상천저수지에서 종수가 바라본 윤슬을 본다. 그는 반짝이는 물비늘을 보며 어떤 결심을 했을까. 아침 물살을 치고 가는 바람의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다.

    이달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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