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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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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ON- 김시탁의 전원산책] (1) 난에 취한 사람들(상)

사랑해! 蘭… 즐거워~ 난

  • 기사입력 : 2023-12-22 08: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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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시탁의 전원산책’은 도시를 벗어난 전원에서 꿈에 물 주고 희망을 일구며 영혼의 뱃살을 불려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농부의 삽날을 깊숙이 받아내는 땅심 좋은 흙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바람의 길목에 꽃밭을 일구고 향기로 사람을 머물게 하는 찻집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첫 방문지는 이 황량한 겨울 복판에서도 채식의 시간을 베어 먹으며 녹색의 피를 수혈받는 난인들의 난 전문 하우스를 찾았다. 상·하편으로 나누어 내년 봄 하편에는 개화한 난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향을 담을 계획이다.

    여유를 버무려서 간이 잘된 일상을 비벼먹고 건강한 터치로 채색한 삶은 은은한 빛이 난다. 그 빛을 찾는 아름다운 여정이 될 것이다.


    난의 매력에 푹~
    주말이면 배낭 짊어지고 자생지 찾거나
    난 하우스에서 난에 심취해 행복한 시간
    온갖 정성으로 애지중지… 잡념 지워줘

    한 애란인이 난실에서 내년 봄에 개화할 난의 꽃망울을 수태로 감싸주고 있다./김시탁 시인/
    한 애란인이 난실에서 내년 봄에 개화할 난의 꽃망울을 수태로 감싸주고 있다./김시탁 시인/

    ◇난 삼매경에 빠지다

    요즘 난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난 하우스에서 난을 전문적으로 배양하는 사람들이다. 현직에 있거나 정년을 마친 사람들, 자영업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 직업은 다양하나 하나같이 난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주말이면 배낭을 짊어지고 자생지를 찾아 채란을 가거나 아니면 난실에서 난과 함께 채식의 시간을 보낸다. 관수를 하고 선풍기를 틀어주고 분갈이할 난은 분주해서 심고 호칭을 적어 팻말을 꽂는다. 내년 봄에 개화할 난들은 꽃대가 마르지 않도록 화통을 씌우거나 수태를 감아 기온이 낮은 곳에 관리한다. 설비가 잘 갖추어진 난실에는 에어컨이 설치된 난 발색실이 따로 있다. 아무리 고가의 우수품종들도 발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므로 온갖 정성으로 애지중지 노심초사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니 즐겁다. 관수 후 물 빨아 당기는 소리도 들리고 라디오 음악에 맞춰 난이 이파리를 흔들며 가락을 타는 듯한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흐뭇하다. 난 삼매경에 빠지면 일상을 잊으니 난은 잡념을 지워주는 지우개다. 씹을수록 질기고 무딘 무기질의 시간도 난실에 퍼질러 앉아 있으면 부드럽게 이완되어 틀니로도 씹을 수 있다. 나이 들어 배운 외도치고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 대놓고 즐길 수 있어 좋다. 아무 때나 마음 가는 대로 만나고 만지고 비비고 품고 다녀도 흉보는 사람도 없다. 같은 이불 덮고 사는 사람도 질투하지 않을뿐더러 난이 안방 차지하고 앉을 일도 없으니 가정파탄 날 일도 없다. 그러니 난과의 외도는 일방적인 면이 있으나 합법적이다. 그래서 난과 사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난과 연애로 결혼한다. 콩깍지가 눈에 씌어 스스로 택한 운명 같은 것이다. 그들은 좋아하는 관계만큼 이혼하지 않고 새끼 치며 지겹도록 잘 산다.

    필자 역시 난에 대해서는 그들과 한통속이다. 난과 연애한 지 30년이 넘었다. 낳은 자식만도 숱하지만 전국 사방으로 시집가고 흩어지는 바람에 가끔씩 난 전시장이나 경매장에 가서야 떠난 자식들을 재회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난에 대한 기본 지식은 알고 가야겠기에 난의 속곳을 잠깐 들추어 본다.

    여기서 말하는 난은 한국 춘란을 말하며 보춘화로도 불린다. 주로 우리나라 남도 지방에서 자생하는데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로 요즘은 경북지역으로까지 서식지가 확산되었다.

    세력이 왕성해 꽃대가 자라는 난들과 갓 분갈이한 난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김시탁 시인/
    세력이 왕성해 꽃대가 자라는 난들과 갓 분갈이한 난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김시탁 시인/

    우리 춘란은 중국의 보세란과는 달리 꽃대 하나에 한 개의 꽃이 피는데 주로 빠르게는 3월부터 4월 중에 산지에서 개화한다. 일본이나 중국 동양란에 비해 꽃의 색깔이 맑고 투명한 것이 특장점으로 꼽히지만 향기가 엷은 것이 단점이다.

    물론 그중에도 유향종이나 제주의 한란은 그 향이 매우 맑고 진해서 애란인의 사랑을 받는다.

    제주 한란은 춘란과는 달리 꽃대 하나에도 여러 개의 꽃이 피며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춘란의 가치를 구분 짓는 방법은 꽃을 보고 판단하는 화예품과 잎을 보고 정하는 엽예품으로 크게 분류된다. 화예품은 색의 농도와 다양성에 따라 그 예를 달리하고 엽예품 역시 입장의 무늬와 넓이, 길이에 따라 예가 달라진다. 아무 특징이 없는 일반 춘란에 비해 꽃의 색깔이나 잎의 무늬 및 특성에 따라 변이종으로 분류되고 그 변성이 고정화되면 명실공히 우수한 품종으로 인정받게 된다. 애란인들이 채란을 위해 전국의 산지를 누비고 다니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변이종을 발견하기 위함이지만 그 확률은 천종산삼을 만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난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난우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애배한 난들을 품평회나 전시회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선보이기도 한다.

    엽예품은 신아가 자라 성촉이 된 가을에, 화예품은 꽃이 개화하는 3월에 맞춰 주로 전시회를 연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난 단체가 많은데 우리 경남에도 경남을 대표하는 경남난연합회가 있고 동양란 연합회가 있다. 또한 단위 난우회만도 서른 개가 넘는 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니 그만큼 애란인이 많다는 증거다. 이제 난인들은 난 배양을 개인적으로 집에서 하지 않고 최적의 환경과 시설을 두루 갖춘 전문 난하우스에서 배양한다. 도회지를 벗어나면 난 전문 하우스가 여러 동 있는데 그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대략 5평가량 되는 공간을 칸막이로 분리해 개인에게 임대해 주고 있다. 난하우스는 전문적인 관리를 통해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차광시설이나 통풍 문제도 해결되어 난배양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한 첨단의 방범시설까지 완비하였으니 고가의 난을 도난당할 우려도 없다. 그렇게 난 하우스 안에는 많게는 서른 개, 적어도 열 개 정도의 난실이 설치되어 있다. 그렇게 난실에서 난을 배양하면 난 재배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상호 공유함은 물론 재배 상태를 비교 분석도 가능하니 배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시사철 푸르름
    엄동설한 산지서도 새파랗게 살아 있어
    눈 속을 뚫고 뻗은 잎은 아름답고 처연
    한결같은 모습으로 난인들 사로잡아

    분주한 난에 신아가 달려 있다.
    분주한 난에 신아가 달려 있다.

    ◇사시청청불변심(四時靑靑不變心)

    난은 사시사철 푸르고 변함이 없어 좋다. 엄동설한 산지에서도 난은 새파랗게 살아 있다.

    눈 속을 뚫고 칼날같이 뻗은 난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처연하고 아름답다.

    비굴하게 숙이거나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지도 않는 난에게서 중용을 배운다. 난을 배양하며 가슴에 넣어놓은 교훈은 과한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이다. 관수도 시비도 햇볕도 바람도 모두 과하면 탈이 난다. 너무 건조하거나 습한 곳보다는 통풍이 잘되는 반그늘을 좋아한다. 너무 햇살에 노출되거나 그늘 속에 갇혀 있는 곳도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다. 흙도 돌도 아닌 물 빠짐이 좋고 숨구멍이 있는 콩알 크기의 난석이 뿌리내리기에 적합하다.

    난은 한자리에 나지만 제 갈 길을 알고 이파리를 뻗는다. 서로 엉겨 붙어 상처 주지 않고 자랄 만큼 자라면 스스로 멎는다. 지혜와 절제를 아는 것이다. 예부터 사군자의 하나로 선비들의 붓 끝에 각양각색으로 그려졌던 난이다. 붓으로 치는 난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듯이 난을 키우는 방법을 봐도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건조하게 키우면 난 잎 끝이 타지만 뿌리는 튼튼하다. 습하게 키우면 잎이 타지 않고 입장이 웃자라며 뿌리가 가늘다. 넉넉하게 시비를 하면 진록의 잎을 보게 되고 물을 자주 주면 꽃대가 올라오지 않아 개화 시기를 놓친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화아분화(식물이 정상적인 조건으로 자라 꽃눈을 달게 되는 일)를 강행하면 그해 꽃구경은 할 수 있겠으나 난이 과부하에 걸려 자칫하면 고사한다. 난은 몸 한구석 어디에라도 병균이 붙게 되면 멀쩡한 성촉을 떼어내도 결국 전이되어 고사한다.

    요즘은 대체로 난을 전문 하우스에서 키우지만 난하우스가 없어 가정집에서 배양할 때는 난의 병해는 물론 냉해와 동해로 많은 난이 고사했다. 아파트에서 난을 배양하기 위한 공간이라고는 앞 베란다밖에 없으니 빨랫대를 철거하고 난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는 고온 다습하고 통풍이 원활하지 못해 병해가 올 수 있으므로 관수를 하고 나면 뒤 베란다 문까지 모두 개방해야 했다. 졸지에 빨래 널 곳을 빼앗긴 아내는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뒤 베란다에 빨래를 널 때마다 도다리 눈빛을 보내다가 겨울이면 온 식구 다 얼어 죽는다고 그 눈빛에 레이저광선을 넣은 눈총을 사정없이 쏘아댔다. 그 비난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휴지를 돌돌 말거나 면봉으로 난 잎 사이에 끼인 물기를 훔쳐내고 있노라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난잎이 괜찮아 괜찮아하고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그 말에서 청정계곡 돌미나리를 혀끝에 물고 있는 듯한 향기가 풍겼을까. 정말 괜찮았고 행복했다. 난은 환경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난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난을 가장 잘 기르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고 난을 가장 외롭고 힘들게 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난은 사람을 배반하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변심하는 건 사람이다.

    소엽풍란 석부작과 목부작.
    소엽풍란 석부작과 목부작.

    ◇일생일란(一生一蘭)

    난인에게는 누구에게나 일생일란이라는 게 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며 애배하는 난이다.

    일생일란은 아내 모르게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한 난일 수도 있고 채란을 통해 행운을 맞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전자에 속한다.

    난인들은 좋은 난을 보면 땡빚을 내서라도 구입하고 싶어 안달을 한다. 실제로 그렇게 구입한 난인들도 많다. 단언하건대 그들 중 제정신인 사람은 고가의 난을 구입하면서 아내와 의논하지 않는다. 의논 자체가 아름답게 될 수 없으므로 아내 모르게 구입한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물으면 산에서 채취했다거나 동료 난인에게 얻었다고 둘러댄다. 그때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말을 더듬어 의심을 사면 바로 꼬리를 내리지 말고 정신부터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구입한 난값을 턱도 없이 깎아내려 사태를 수습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난인들의 아내들은 산에 가면 좋은 난을 쉽게 구하는 줄 알고 난인들은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 고가의 난도 서로 분주해서 척척 잘 나누어 주는 줄 안다. 그것도 아니면 모른 척 속아준다. 난(蘭)으로 인해 난(難)을 만날 듯하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큰애 키우는 심정으로 속아주는 아내들도 있다. 난초처럼 고결한 영혼들이다.

    일생일란도 식물이고 생명이니 병들어 죽지 말라는 법은 없다. 행여 병이 들면 두 눈 뜨고 죽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하니 가슴이 미어터진다. 아내 모르게 모은 몇 년치 비자금을 투자해 구입한 난일 수도 있고 정말 그분이 점지해 주신 듯 심봤다를 외치고 뒤로 미끄러져 실신 직전에 얻은 채란일 수도 있지만 애타는 마음은 다를 수 없다. 난이 병해로 잎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식음을 전폐하고 같이 타들어가는 난인도 있다. 일생일란은 일심동체인 것이다.

    그쯤 되면 아내가 병든 난이 예사의 난이 아님을 눈치채고 속이 부글거리지만 흰자만 남은 사람에게 따발총을 발사할 수는 없으니 닭똥집처럼 튀어나온 입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입이 뱉지 않고 물고 있는 말을 난인들은 다 안다.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슴에도 먼지가 일어 자주 열어 주지 않으면 곰팡이가 핀다. 가슴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여럿 있지만 그중 취향의 창을 열고 난을 키우는 방법도 해당된다. 자신이 디자인하고 채색한 삶을 탄력 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난을 통해 찾은 사람들, 그들은 이 겨울 한복판에서도 싱싱한 채식의 시간을 베어 먹고 녹색의 피를 수혈받으며 산다. 덧칠하지 않아도 단아한 삶의 단면이 건강해서 보기 좋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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