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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김옥대, 김정임- 김수환(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23-08-10 19: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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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을 새로 짓고 새 대문에 문패를 다는 꿈은 명예나 신분, 직위 등이 높아지거나 널리 알려지는 꿈이고, 반대로 자기 집 문패를 스스로 떼거나 누군가가 떼 내면 직권이나 인기, 명성이 급속히 몰락하는 꿈이다. 또 이사 간 집에 문패를 다는 꿈은 장차 큰일을 할 아이를 갖게 되는 길몽이라고 한다.

    지금은 문패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로 문패가 사라진 시대다.

    때때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거나 밝혀야 할 경우에도 이름 석 자 중 가운데 한 자를 블라인드 처리를 하는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 시대에 이름 석 자를 새긴 문패를 대문에 걸지도 않으니 문패에 관한 꿈도 꾸지 않을 것이고 저러한 꿈해몽도 찾아볼 일도 없다.

    함안 강촌의 말단 면서기였던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마산에 세컨하우스를 내고 자식들이 중학생이 되면 차례로 전학을 시키셨다. 교방동에 셋방을 얻어 어머니는 과자와 부식을 파는 구멍가게를 열고 부지런히 질금을 담가 여기저기 팔면서 자녀 교육에 공을 들이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세대를 훨씬 앞서간 주말부부, 월말부부 생활을 하신 셈이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살다가 ‘민영주택 몇 호’라는 문구가 들어간, 당시로서는 매우 생경한 형태의 우리 집을 장만하셨고 드디어 우리 아버지도 새집에 새 문패를 다는 경사를 맞으셨다. 아버지의 인기와 명성은 적어도 우리 가족들 간에는 최고로 올라갔으리라.

    어떤 영화를 보면 방에 놓여있던 화분을 통해 염력 같은 신비한 힘으로 그 방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문패도 그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문패 자신의 탄생 비화는 물론이고 대문에 걸린 그 순간부터 대문을 들고 났던 사람들의 면면과 그때의 표정과 마음과 사연들을 다 알고 있을 것 같다.

    주말, 월말에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뛸 듯이 대문을 들어서던 아버지, 주말을 끝낸 아버지가 돌아가던 날이면 한참 동안 대문을 닫지 못하고 저 모퉁이에 남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 통금시간이 다 되도록 대문 앞에 서 있다 발길을 돌린 까만 교복과 하얀 연기를 내뿜는 차 뒤를 따라 뛰는 아이들의 환호도 다 기억하고 있을까.

    막내 격인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 집은 다시 마산을 정리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지금은 종일토록 한 사람도 오지 않는 마당을 햇빛만이 이곳에서 저쪽까지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지우면 하루가 가고 마는 시골집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이름을 새긴 문패가 지키고 있다. 저 문패는 이제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

    한사코 마당에서 도랑으로 건너가려는 호박넝쿨의 길이를 날마다 재보거나 오늘은 용케 굶지 않았는지 빈집 고양이의 하얀 아랫배를 살펴보는 것 외는 하는 일이 없다. 그래도 된다. 아버지는 당신의 문패를 당신이 평생 타고 오신 배의 녹슬고 지친 닻같이 저기에 걸어두고 다시 올 기약이 자꾸 희미해지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어머니는 몇 해 전, 저 높고 깊은 나라에 먼저 가셨다. 어머니는 거기서 다시 월세 전세로 시작하여 장만한 민영주택에 아버지, 어머니 이름을 새긴 새 문패를 걸어두고 닦으면서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뛰어올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실지 모를 일이다.

    김수환(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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