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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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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본거지(本據地)-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 기사입력 : 2023-05-29 19: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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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가 듦에 따라 자꾸 옛것이 그립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서일까? 자문해 보는 요즘이다. 작년까지는 잘 몰랐는데, 갈수록 주변 사람들보다 나무나 꽃들이 더 향기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굳이 봄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사람이 더 좋아져야 할 텐데 말이다. 외로움을 견디는 것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무튼 올해부터는 그러하다.

    바야흐로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열리지 못했던 온갖 행사가 개망초처럼 지천으로 널려 피어도 섣불리 발길이 옮겨지지 않는다. 행사 의미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웅장한 것들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조용히 치부한다.

    오랜만에 일찍 저녁을 해결하고 산책길에 오른다. 무엇을 하며 사는지 하루라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드물다. 아무런 약속 없는, 내 몫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헐렁함에 뒷짐 지고 느슨하게 용두산을 오른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까지 살았던 내 고향 동네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형형색색 준비하는 바쁜 용궁사를 지나 용두목 정상에 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일자봉 등산로를 따라 ‘밀양아리랑길’이 연결된다. 왼쪽은 천경사 가는 길인데, 중간쯤에 작은 사각 정자가 숨은 듯 웅크리고 있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그래 여기였지. 지금도 내 사무실 컴퓨터 바탕화면 배경인 여기! 경부선 밀양철교와 대구부산고속도로가 한눈에 부챗살처럼 펼쳐진 곳. 가운데 흐르는 밀양강 줄기는 영남루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발 아래는 족히 백 미터나 되는 낭떠러지다. 조금 멀리는 낮은 산들이 어깨동무하고 있고, 들판에는 밀양에서 유명한 강변의 찻집과 고깃집이 벌써 간판 불을 밝히고 있다. 비닐하우스 지붕을 쓰다듬는 평온한 바람 따라 하루가 저물어 간다. 서서히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이 내게 무슨 말을 걸어온다.

    그랬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지난 내 삶이 전환점이었을 때마다, 요즘 힘겨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이곳에서 오래 생각을 다듬었고, 다듬는 중이다. 유년 시절을 몽땅 보낸 저 강가의 오랜 물살이 풍기는 비루하고 미지근한 냄새를 안다. 요란하지 않게 내는 자귀나무 꽃들 손뼉 소리와 갈참나무 아래 다람쥐가 도토리를 까먹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저 강물을 가로지르는 보가 넘치도록 울던 사람들을 보았다. 강의 물보다 사람의 눈물이 더 많다는 것을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러나 자주 이곳에 오지는 않는다. 웬만하면 아껴둔다. 이곳에 와서 내린 결정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고민을 할 때마다 오면, 어떤 신성함을 잃어버릴까 하는 나만의 비밀 장소인 셈이다. 오늘은 그냥 발길이 이곳을 찾았다. 큰 방향을 바꾸는 일이 생길 나이도 지났고, 선택을 강요받는 긴장감이 덜한 즈음이라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싶다.

    오늘은 아마, 내 흔적을 보기 위해 발길이 이곳에 도착한 듯하다. 그동안 잘 살아왔는지, 현재 잘 살고 있으며, 앞으로 잘 살아갈 것인지 무슨 점검 차 온 것 같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이런 자기만의 본거지가 있으리라. 아지트는 함께 한 구성원이 있을 때 모이는 장소라면 본거지는 혼자만의 사색 공간이리라. 그것도 유년에서부터 성장 과정에 자주 만난 곳이라면 더없이 특별하고 뜻깊은 의미가 있으리라.

    여러분도 이 글을 읽으며 한번 생각해 보시라. 멀리 있지 않아도, 내 인생 터닝포인트를 준 그곳을 찾아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거나, 오늘 당장 그곳으로 떠나보시라! 그곳에서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멋진 나를 만나보시라!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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