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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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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부드러움에 대하여- 정해룡(시인·전 통영예총회장)

  • 기사입력 : 2022-10-19 19: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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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풍 11호 힌남노의 북상을 알리는 뉴스가 연일 계속되던 때였다. TV에서는 힌남노의 위력이 사라호나 셀마를 능가하는 역대급 태풍으로 피해를 예방하는 갖가지 방법을 안내하고 있었다. ‘지난 앞선 태풍 때에도 저렇게 보도했지만 별 탈 없이 지나가지 않았나’라고 생각하다가 어릴 적 사라호 태풍 때 안방의 벽이 무너지고 지붕의 기와가 날아가 버린 처참했던 아린 상흔이 되살아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난 당국에서 알려준 대로 창문의 유리창이 바람에 흔들려 깨지지 않도록 청테이프를 붙이고 창문 틈 사이사이엔 신문지를 끼웠으며 마당에 웃자란 나뭇가지를 자르고 바람에 날아갈 만한 가재도구와 물건들을 치우고 묶는 등 나름대로 힌남노를 맞이(?)할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자위하면서 평상에 앉아 태풍이 몰려올 하늘을 쳐다보니 나무와 나무 사이에 길게 늘어진 거미줄이 눈에 띄었다. 거미줄을 걷어치우려다가 ‘걸어가는 사람을 날려버릴 위력의 태풍이라면 저 정도의 거미줄 따위야 쉽게 날려 보내겠지’라는 마음에 거미줄을 그대로 놔두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힌남노가 휩쓸고 지나간 마당에는 떨어진 나뭇가지며 잎사귀, 쓰레기 등속이 범벅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태풍 오기 전에 치우려다 만 거미줄이었다. 모질고 독한 비바람에도 거미줄은 끄떡없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거미줄이 나뭇가지보다 더 단단했던 것이다. 역대급이라던 힌남노도 저토록 가냘프고 연약한 거미줄을 어쩌지 못할 줄이야! 그것은 놀람이자 경이였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지 않던가. 새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거미가 된 아라크네가 떠올랐다.

    아라크네는 베를 잘 짠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그녀를 칭찬하자 그녀는 우쭐하여 아테나 여신과 베짜기 시합을 하게 되었고, 여신보다 베를 더 잘 짰으나 여신의 질투로 아라크네는 거미로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거미줄은 아라크네의 베짜기 솜씨가 변한 것으로 비록 연약하되 역대급이라는 태풍을 이겨 낼만큼 정교하고도 강하다는 사실에서 부드러움이야말로 진정 강함을 일깨워 준다.

    부드러움에 대한 것이라면 여성을 능가할 부드러움은 또 없다. 일본의 동화작가 카와무라(川村) 타카시(たかし)의 〈비오는 밤의 집 보기〉에 “어머니가 들어왔습니다. 집 안은 단번에 따뜻해졌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삭막했던 집 안에 어머니가 들어옴으로써 집 안은 일시에 긴장이 풀리고 부드러워진다. 어머니는 물론 여성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집 안에는 살림 사는 여성의 부드러움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집다워진다. 집이 숨을 쉬게 되며 집 밖으로는 사람이 살아 있는 향기를 내뿜는다. 결혼한 모든 남성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한 사람의 자기 아내를 똑바로 이해하면 몇 천 명의 여자를 아는 것보다 더 깊이 모든 여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언급했듯이 여성의 진면목이란 결국 부드러움이라는 것을, 여성의 부드러움이 얼마나 깊고 오묘한 것인지를 자신의 아내를 통해 깨닫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여성이 다 부드럽진 않다.

    특히, 여성을 위한다는 여성가족부부터가 부드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작금, 여성가족부 존폐문제로 야당은 물론 시민단체의 반대가 뜨겁지만 이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왜일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 때,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 지칭하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했어도 피해 여성을 보호해야 할 여가부가 보호는커녕 스스로 존재 자체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여가부가 존치된다면 여야와 지지단체를 떠나 반드시 여성 고유의 부드러운 순기능을 되찾아 주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정해룡(시인.전 통영예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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