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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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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람 사는 도리, 어떻게 살 것인가- 조광일(수필가)

  • 기사입력 : 2019-05-29 20: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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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꽃이 한 차례 지나간 자리에 이팝 꽃, 아카시아 꽃이 잇따라 하얗게 피어오르면서 벌 나비도 덩달아 가슴이 뛴다. 꽃들은 여느 해처럼 예쁘게 피건만, 사람 사는 세상은 어째 늘 앙잘앙잘 살풍경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고 탁한 도심을 벗어나 고즈넉한 정취를 누릴 수 있는 곳을 즐겨 찾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사실, 나 또한 잠시나마 고택에 머물러봤으면 했다. 그렇게 이제나저제나 하다가 우연찮게 발길이 닿은 곳이 안동의 치암고택(恥巖古宅)이었다. 장모님 탄생 100주년 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조선 고종 때 언양 현감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만현(李晩鉉)의 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이다.

    집을 보면 집주인의 성격과 인품이 보인다더니 곱게 나이가 든 고택은 사대부의 집안답게 단아하면서도 정갈했다. 집 안팎은 온통 유가 경전으로 도배가 되어있다시피 해 솟을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묵향이 그윽하게 느껴졌다. 신독(愼獨) 등의 경구를 곳곳에 붙여놓고는 스스로를 경계했으니, 집주인이 얼마나 심지가 곧고 깔밋한 성품을 지녔던 사람인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안채와 바깥채를 두루 돌아보며 빼곡히 붙어있는 경구를 하나하나 적바림하다가 사랑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에 나의 눈길이 확 꽂혔다. ‘入朝當戒喜事 입조당계희사’ ‘持心貴在不欺 지심귀재불기’라는 글귀였다.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함부로 일을 벌이지 말고,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라는 뜻으로, 약관의 율곡이 퇴계 선생을 방문했을 때 당부한 내용이라고 한다. 참으로 이 나라 모든 목민관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야 할 금언이 아닌가.

    여기서 깊은 울림을 주는 대목은 바로 ‘희사(喜事)’이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즐겁고 기쁜 일’이다. 혹자가 의역한 대로 나라님이 듣기 좋아하는 일보다는 백성이 기뻐하는 일을 위해 힘쓰라는 뜻으로 해석함이 마땅할진저, 위정자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표징과 훈계는 없을 듯했다.

    치암은 퇴계 선생의 11대손으로 문과로 벼슬길에 나아가 멸사봉공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선비였다. 하지만, 만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를 잃고도 살아있음이 내 집에 있는 바위 보기가 부끄럽다’ 하여 호를 ‘치암(恥巖)’이라 짓고는 비분강개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는 설명을 듣고 숙연해졌다.

    이튿날 아침, 선생의 고택을 나서면서 문지기처럼 치암 선생의 올곧은 선비 혼을 기리고 있는 바위를 바라보니 묘한 자극을 주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고 묻는 것 같아 뜨끔했다.

    근래 사람의 마음이 예스럽지 못하여 염치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그로 인해 사람 사는 도리가 제대로 서지 않는 요즘, 진정한 우국충정이 어떤 것인지, 시대에 부응하는 양식 있는 사람으로서의 소명은 무엇인지…. 무거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조광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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