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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 가야문화 (2) 함안 아라가야

아라가야 토기, 일본 곳곳서 발견돼 활발한 교역 증명
아라가야는 금관가야 몰락 후 백제·신라·왜와 4국회의 주재 ‘막강’
아라가야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

  • 기사입력 : 2018-10-16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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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세기경 6가야 형성기에 함안 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된 아라가야는 561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와 함께 가야 6국을 이끈 중심세력으로 문헌에 기록돼 있다. 얼마 전 50m 왕성 터가 발견되며 당시의 영광을 단편적으로 보여줬다. 토성의 높이가 8.5~10m에 달하는데, 금관가야 토성 높이가 3m, 백제 몽촌토성이 6m인 것과 비교하면 그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의 아라가야는 백제, 신라와 쌍벽을 이뤘다. 금관가야의 몰락 후 대가야를 제치고 백제와 신라, 왜 사신을 불러들여 4개국 회의를 주재했다는 기록이 국력을 뒷받침한다. 아라가야 사람들은 왜로 건너가 토기와 철기 등 선진 문화를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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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무늬토기를 형상화한 함안박물관 조형물.


    ◆강 이름에서 유래된 아라가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 고문헌에 아라가야는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야가야(阿耶伽耶)’, ‘안라(安羅)’ 등 여러 이름으로 나온다. 예전 이두를 사용할 때는 한글 이름을 한자로 차용해 적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같은 이름으로 본다. 또 한국과 일본 양국 기록에서 아와 안 두 글자가 공통으로 발음될 수 있는 것은 ‘아’뿐이므로 ‘아라’를 원형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상고사 제3편에 ‘안야는 아라로 읽는데, 물 이름이니 지금의 함안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조선사연구초 제1편에 ‘삼국사기 신라지리지의 아시량과 일본서기의 아례진(아라진)이 낙동강의 옛 이름이 아라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 문헌들을 근거로 물 이름인 ‘아리라’에서 ‘리’가 탈락된 아라가 나라 이름이 됐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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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함안 가야리에서 개최한 발굴조사 설명회에서 관계자들이 왕성 터 발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경남신문DB/


    ◆조형미 뛰어난 가야 토기=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면 토기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기원후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가야지역인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회청색의 아주 단단한 토기가 등장한다. 이전과는 다른 형태에 새로운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이 토기들은 ‘고식도질토기’로 불리는데, 온도를 더 높일 수 있는 가마와 기술력이 필요했다.

    가야는 독특한 상형토기를 빚었다. 권역 곳곳서 배, 오리, 신발, 집, 수레바퀴, 말, 짚신, 새, 뿔, 등잔 등 다양한 상형토기들이 발견된다. 고구려나 백제와 비교하면 신라도 상형토기가 많은 편이지만 조형미와 기술력에서 차이가 있다.

    1000도 안팎에 이르는 고온 유지가 가능한 가마에서 구워야 하는 경질토기가 나온 이후 가야와 신라토기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가야토기는 곡선을, 신라토기는 직선을 많이 이용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예를 들어 신라의 목항아리는 몸통과 목이 연결되는 부분이 각을 이루고 직선으로 이뤄져 있지만 가야는 이음새가 불분명할 정도로 부드럽게 연결되고 곡선으로 처리돼 있다. 5세기 이후의 가야토기는 부드러운 곡선의 미를 살려 세련된 느낌을 준다.

    아라가야 사람들은 토기 다리에 동그라미와 세모를 합쳐 불꽃을 형상화한 무늬를 뚫어 장식했다. 불꽃무늬의 형태에 따라 시기를 구분할 수 있으며, 제례용·조명용으로 쓰였다고 본다. 역사소설을 펴내는 등 아라가야를 연구해온 조정래 함안군 환경위생과장은 “불꽃무늬토기의 불꽃은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한 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아라가야가 흙과 불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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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에 전시 중인 불꽃무늬토기.


    ◆넓게 퍼진 아라가야 토기= 굽다리접시(고배), 그릇받침(기대), 항아리 등 아라가야 토기는 낙동강, 섬진강 유역뿐만 아니라 금강 유역에서도 발굴된다. 특히 함안에서 많이 출토되는 단경호(목이 짧은 항아리)는 경상도, 전라도, 왜 등 넓은 분포권을 보인다. 이는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도공과 가마터가 생겨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안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대표적인 토기가마 유적으로는 우거리와 묘사리 토기가마가 있다. 지표조사를 통해 10여 개소가 넘는 토기가마 유적이 확인됐는데 법수면 일대를 중심으로 집중 분포돼 있으며, 대부분 4세기대에 조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라가야인들은 폐기장을 따로 둘 정도로 많은 양의 토기를 생산했다.

    토기의 형태만큼 눈여겨볼 것이 생산방법이다. 단경호의 입부분을 가마의 입구를 향하도록 옆으로 놓고 그 위에 다시 단경호를 중첩한 점이 특이하다. 가마의 규모와 단경호 표면 관찰을 통해 3단까지 중첩한 사례도 발견된다. 켜켜이 놓고 구우면 더 많은 단경호를 생산할 수 있어서다. 소형토기의 중첩은 소형토기의 수요적 증가를 의미하는데, 단경호가 경상도, 전라도, 왜에 많이 확인되는 것을 토대로 대량 생산한 뒤 유통됐다고 추정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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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가야 불꽃무늬토기.


    ◆스에키 토기에 영향= 고대 일본의 중심지였던 긴키지역에서 아라가야 토기가 출토되고 왜의 하지키(土師器)가 아라가야 권역인 마산 현동 유적, 대평리 고분군에서 발견됐다. 특히 생활유적에서 주로 출토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본 고대사 연구자들은 한반도로부터 토기가 전해진 시기를 대략 3세기로 추정한다. 400년을 전후로 일본 열도에서는 스에키(須惠器)가 제작되며 토기 형태가 완전히 변했다. 일본 토기는 조몬 토기에서 야요이 토기, 그다음 스에키 토기로 바뀌는데, 스에키는 우리말로 쇠기를 뜻하는 일본어다. 오사카부 오바데라 유적에서 가야토기와 똑같은 양식의 토기가 출토됐고 이즈미(오사카 남부)에서 스에키를 굽던 가마가 발견됐다. 이는 도래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과 거의 일치해 가야인이 기술을 전수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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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박물관에 전시 중인 말이산고분군에서 출토된 굽다리등잔. 한국에서 발견된 등잔 중 가장 많은 7개의 등잔이 달려 있다.


    ◆왜와 활발한 교류= 아라가야와 왜의 교류는 남강-낙동강을 통한 간접 교역로와 진동만, 마산만을 이용한 직접 교역로로 구분할 수 있다. 남강-낙동강 간 교역로는 4세기에서 5세기 전엽에 주로 활용됐는데 김해 금관가야 수장층을 통해 아라가야인들이 간접적으로 왜와 교류했다. 이후 김해지역 세력이 몰락하자 직접 교역이 활발해졌다. 특히 진동만은 창원 대평리 유적, 덕곡리 유적 등 4~6세기 고분군이 밀집하는 점으로 보아 아라가야 최대 항구로 추측된다.

    양국 관계를 알 수 있는 물질적 증거가 토기다. 아라가야를 대표하는 굽다리에 불꽃무늬 구멍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가 일본 열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라현 가시하라 시청 소속 발굴단이 ‘신도우유적’에서 파손된 상태로 발견한 토기 조각을 복원하자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로 드러났다. 이것은 현재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와 전체적인 모양, 색깔, 재질 등이 똑같다.

    이 밖에도 함안 말이산 34호분 출토 녹각제도장구, 도항리 13호분 출토 삼각판혁철판갑, 마산 현동과 진북 대평리에서 출토된 스에키와 하지키, 일본 천리시 후루 유적과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 등은 두 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아라가야계 이주민들이 일본에 여러 선진 문화를 전파했지만 일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사카부립 치카츠아스카 박물관 모리모토 토오루 부관장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라가야인들이 일본 열도 현지인들과 어떠한 관계 속에서 살아갔는지 살피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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