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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310) 제22화 거상의 나라 70

사람의 기품은 경솔하고 사나우며…

  • 기사입력 : 2018-04-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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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는 유관에게서 소탈한 선비의 멋을 느꼈다.

    “사람의 기품은 경솔하고 사나우며, 굳세고 과감하고, 유약하여 기력이 없으며,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것이 모두 같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은 진범이면서도 능히 형벌을 이겨내고 끝내 자복하지 않는 자도 있으며, 혹은 무고(誣告)를 당하고서도 형벌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끝내는 죄를 입게 되는 자가 있습니다. 형벌을 주관한 이들은 다만 사람이 자복하는 것만을 기뻐하고, 생명이 소중한 것은 생각하지 않아 법에 없는 형벌로 온갖 고문을 행하여, 죄상이 드러나기 전에 벌써 형장(刑杖)에 맞아 죽게 되니, 전하께서 호생(好生)하시는 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중앙과 지방에서 형벌을 쓰는 자들에게 고문은 다만 법률 조문에 의거하여 행하게 하고 법 외의 형벌은 일절 금하게 하며, 항상 그 말과 안색을 살피고, 증거를 대조하여 그 진위를 밝혀 함부로 형벌을 쓰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유관은 형조판서를 역임할 때 태조에게 고문을 금지하게 아뢰어 이를 실행하기도 했다. 고문 금지는 인권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정승이 작은 우산 하나를 들고 있는 것은

    지붕이 새어 비를 막기 위해서라네.

    침상과 방에 비가 새어 마른 곳이 없는데

    그나마 우산이 있어 머리를 가릴 수 있구나.



    이익이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남긴 시의 일부다. 성호 이익은 <우산에 대한 노래〔手傘行〕>에서 유관의 청렴한 모습을 칭송하고 있다.

    선조와 광해군 때 청직을 두루 역임하고 물러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남긴 문신 이수광은 어머니 유씨 부인이 청백리 유관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우산각이라고 불리던 초가를 물려받았다. 이수광은 조선의 대학자로, 태어난 곳은 경기도 장단이었으나 외가가 우산각이었기 때문에 유년시절 이곳에 보내면서 학문을 배웠다

    우산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이수광이 다시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불렀다.

    비우당은 비를 막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는 16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순탄하게 벼슬을 했으나 광해군이 계축옥사를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비우당에서 은거하면서 지붕유설을 완성했다.

    아울러《천주실의(天主實義)》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을 중국에서 가져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서학(西學, 천주교)을 들여오기도 했다.

    조선의 문화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지봉유설은 그의 방대한 독서와 깊은 학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조정에 돌아온 이수광은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한 뒤에 66세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장흥 땅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수광 역시 청빈한 삶 속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후세까지 명성을 떨쳤다.

    이수광의 두 아들 이성구와 이민구도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성구는 훗날 영의정까지 지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항상 비우당에서 지냈다. 술을 좋아하여 손님들이 찾아오면 밭에서 손수 가꾼 채소를 안주로 만들어 대접하면서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았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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