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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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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내게로 왔다- 박귀영(수필가)

  • 기사입력 : 2017-04-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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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하고 집으로 들어올 때 습관적으로 우편함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각종 고지서들로 가득한 우편함이지만 가끔씩 배달돼 오는 책들이 있어 반갑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지인들의 책을 받을 때면 펴낸이의 정성이 느껴져 봉투를 뜯기도 전에 마음이 설렌다. 낯선 작가들이 보내주는 책을 받을 때는 그가 누구일까 한참을 떠올리곤 한다.

    아날로그 감성보다는 편리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디지털의 세상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요즘이다. 더욱이 눈으로 바로 보면서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에 밀려 활자로 된 책을 조금씩 멀리하게 된 것이 현실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시간을 억지로 내야 하는 번거로움으로 여기게 됐으니 안타깝다.

    우리가 요즘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SNS를 통한 글 읽기의 효과는 활자로 된 책보다 이해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간접 경험을 하고 세상을 만나고 생각의 깊이를 키워 간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이정웅 화가의 ‘책으로 그린 자연 이미지’ 초대전을 보고 왔다. 책으로 이미지를 그린다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갤러리에 들어서서 바라본 공간 속 그림의 이미지는 한 장의 사진처럼 보였다.



    우리의 눈에 익숙한 자연의 풍경은 그저 평범하고 단순해 보였는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책으로 만든 또 다른 세상이었다. 다양한 책들을 칼로 일일이 회를 뜨고 얇고 어슷하게 혹은 직선으로 잘라 풀을 부치고 색을 칠했다. 종이죽으로 만든 수탉은 힘찬 날개를 펴고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은 힘찬 기운이 느껴졌다.

    버려질 뻔했던 오래된 책들의 조각들을 모아 작품 하나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활자들이 들어 있던 책 속의 시간은 새로운 공간을 메워가며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화가는 책을 모으는 일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고 했다. 오랜 세월의 때가 묻은 책부터 최근의 다양한 책들까지 그림의 재료는 그야말로 책인 셈이다. 누군가가 생각 없이 버렸던 책이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다니 화가의 독창적인 발상이 놀랍기만 했다. 책은 이미 그 존재를 뛰어넘어 나에게로 왔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정성으로 책을 펴내고 누군가는 그 책을 소중하게 읽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책이 귀찮은 물건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준 책이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고, 가구를 지탱해 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본 어느 작가는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며 허탈한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린 이정웅 화가의 ‘자연으로 그린 이미지’전은 그래서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전시회였다. 책은 누군가의 인생이고 한 사람의 분신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많은 책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말 그대로 그것을 아끼면서 제대로 읽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봄, 연둣빛 설렘으로 책이 내게로 왔다.

    박귀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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