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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7) 김경미/해명

  • 기사입력 : 2016-08-19 14: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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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그 여자요?
     첫인상이 그리 따뜻하진 않죠?
     살짝 눈 내리깔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올리거나 멀리 있는 무언가를 무연히 바라볼 때,
     특히 옆모습이 쓸쓸하다 못해 차갑다 느껴질 거예요.
     사실 그 여자, 손발도 무척이나 차답니다.
     그래서 한겨울엔 장갑과 부츠가 필수죠.
     그것도 모자라 입과 콧잔등을 푹 덮을 만큼 길고 두터운 머플러도 늘 백에 넣어 다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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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에겐 스물다섯 먹던 해가 어떤 기점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가 진짜 아가씨 태가 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 해부터 두 볼 넉넉하던 젖살이 내리고 턱이나 미간에 수시로 자리 잡던 여드름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마 여자들은 알 거예요.
     옷맵시가 나기 시작하고, 화장도 보송보송 잘 먹고, 많이 먹어도 허리가 저절로 잘록해지는 어떤 시기를요.
     꽃봉오리가 사방으로 벌어지는 단 한 번의 계절을요.
     
     꽃이 피면 향기가 나기 마련이고, 그 향기를 맡고 이리저리 오가는 남자들이 생겨납니다.
     이십대 중후반을 관통하면서
     여자는 남자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늦가을만 되면 여자의 손끝은 아려왔습니다.
     맞아요. 여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온기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여자는 몸이 뜨거운 남자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품에 안기면, 갑갑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온기를 가진 남자를요.
     사랑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날이면 여자는 남자를 앞에 세워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요. 몸이 따뜻한 사람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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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여자의 소망은 비교적 쉽게 이뤄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은 정말 몸이 뜨거운 남자들이었거든요.
     믿음직한 어깨가 만드는 낙낙한 품은 따뜻했고,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척이나 달콤했죠.
     그들은 그녀의 마음을 훔쳐내기 위해 여자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곤 했습니다.
     '나만큼 따뜻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럴 때마다 여자는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한때는 자신이 진실로 사랑받고 있다고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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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지금은 어떠냐구요?
     여자의 손발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들어진 장갑과 부츠가 몇 개씩, 몇 켤레씩 그녀의 옷장과 신발장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죠.
     지금은 한여름입니다.
     하지만 그 여자, 가끔 이마를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가올 매서운 겨울을 떠올립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와 달라진 바람의 방향, 더욱 붉어진 노을을 통해 그녀는 느끼고 있는 것이죠.
     아주 서서히, 손끝과 발끝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걸요.
     
     아마 그 여자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녀의 손발이 제대로 덥혀진 적이, 사실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걸요.
     여자를 쟁취하려할 때의 남자란, 전력질주하듯 본능적으로 온몸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요.
     그들이 가진 온기는 그녀가 갈구했던 온기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걸요.
     때문에 그녀를 떠나거나 그녀 스스로 떠나게 만든 남자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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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여자에게도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필요 없어진 장갑과 부츠를 정리하는 날이 말이죠.
     따뜻해진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차가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울수 있는 새로운 날이 말이죠.
     그땐 저토록 쓸쓸하고 차가워 보이는 옆모습도 버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말이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그녀가 진정 원했던 건 뜨거운 몸이 아니라 실은 뜨거운 마음이었다는 걸,
     그것을 '저는요. 몸이 따뜻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완곡하게 에둘러 표현했다는 것을요.
     
     때문에 그녀의 말은 결코 은유(隱喩)가 아니었다는 그 쓸쓸한 사실을
     떠나간 남자들, 알고나 있을까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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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의 처방은 항상 속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이다
     
     전기담요를 먹을까요
     달걀 비린내 나는 뜨건 백열등이라도 먹을까요
     장미무늬 양초와 끓어넘치는 주전자를 함께 먹거나
     홧홧한 박하나 겨자를 얹으면 좀더 빠를까요
     손 닿지 않는 그 안을 어찌 뜨겁게 달굴까요
     
     차라리 개미를 믿지, 개미 지나간 길의 온기를 믿지
     사람이건 꽃이건 비단견직물처럼 매끄러워
     미덥지 않았다
     
     책상이나 서랍만이 더러 눈물 보여주었다
     
     저녁 불빛들로 들판의 겨울 한낮들 덥혀질 때마다
     
     실은 얼마나 따뜻하고 싶었는지
     끝내 말할 수 없었다'
     
     '해명'- 창비/김경미/'고통을 달래는 순서' 94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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